-엄마 반성문
2014년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충주로 발령이 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육아휴직을 했다. 청주가 집이라 주변에서는 어떡해!라고 걱정과 위로해 주었지만 그래도 1년의 육아휴직이 있어 조금은 먼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1년은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아이를 돌보느라 나의 시간은 거의 없었고 친정엄마에게 잠깐 맡긴 몇 시간도 영어나 캘리그래피를 배운다며 몇 개 학원을 뛰어다니다 보니 충분히 쉬면서 충전했다는 느낌 없이 2016년 충주의 한 초등학교로 복직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친정아버지가 운전기사님을 자처하셔서 6시 20분쯤 아버지 차를 타고 청주역까지 태워주셨고 그 사이 어머니가 챙겨주신 김밥이나 유부초밥, 떡 등으로 아침을 먹었다. 청주역에 내려 주시면 6시 50분 충주행 기차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보면 (물론 알람은 필수이다) 7시 40분쯤 어느덧 충주역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학교까지 걸어갔고 덥거나 추운 날은 동료들과 택시를 타고 학교로 들어갔다.
오후가 되어 퇴근하면 5시쯤 걸어서 충주역에 왔고 대합실에서 동료들과 고단한 하루를 이야기 나누거나 잠시 기차선로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멍 때리는 휴식을 가진 후 오후 5시 50분쯤 청주행 기차를 탔다. 내려서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교통사정에 따라 7시에서 7시 30분이 되었다. 일찍 온 남편이 쌀이라도 씻어서 밥을 지어놓으면 밑반찬을 꺼내어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아이들 서둘러 씻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도 이런 반복적인 루틴을 2년이나 했다니 지금도 놀라울 따름이다. 아직도 꿈에 가끔 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오는 기차플랫폼에 서있는 내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 10시에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집에 오는 한국 교육현실을 비꼬어 우스갯소리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나 역시 그런 생활인 것 같았다. 기차역에 방금 전 서 있었던 거 같은데 그 시간이 금방 또 돌아와 서 있는, 하루가 매일 반복되는 어느 영화의 주인공 같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게다가 그 해에 6학년 담임이라니... 처음 맡아보는 6학년이라 처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제법 어려워진 교과수업 준비도 해야 했고 우리 반에 전교 부회장이 2명이라 두 아이의 역할분담 등이 자존심이 안 상하게 신경 써야 했으며 또 과학대회 업무를 맡아 4월 대회 준비하느라 몸이 2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게다가 우리 반 두 전교부회장 어머니들 사이에 경쟁심이 높아 가을에 전교학예회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의 대본 분량이 적다며 불만으로 주말에 전화한 적도 있다. 물론 "내일 통화하시면 안 될까요?"라고 해서 끊기는 했으나 그 두 아이 때문에 정말 많이 속앓이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어느 날은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는데 6살, 3살 아들들이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엄마 보라며 더 익살스럽게 엉덩이를 흔들고 춤추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으나 울음을 감추려고 크게 웃었더니 이 눈치 없는 아들 녀석들은 엄마가 즐거워하는 줄 알고 엄마를 더 웃겨 주려고 더 과장된 몸짓으로 내 눈앞에 다가와 깔깔거리며 춤을 추었다. 나는 그때 하루의 고단함이 따뜻한 온기와 함께 스르르 풀려 마음속으로 '그래 너희들 때문에 산다' 하고 그 둘은 꼭 안아준 적이 있다.
어느 날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6살 아들이 유치원가방에서 학부모 공개수업 안내장을 꺼내 내밀었다. 어릴 때부터 말이 느리고 표현을 잘하지 않는 첫째라 꼭 오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아마 선생님이 엄마에게 꼭 드리라는 말은 잘 기억하고 실천한 거 같다. 나는 안내장을 읽고 나름대로 잘 둔다고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날 엄마는 못 가고 외할머니가 꼭 가게 할게."라고 말해 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그날도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여 저녁을 부랴부랴 차려서 먹고 씻기고 재우려는데 아들이 뭔가 잔뜩 화난 얼굴로 "할머니 왜 안 왔어요?" 한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딜 안 갔다는 거야? 뜬금없이 이제 자자."라고 했다. 말이 느리고 가끔 엉뚱한 말도 하는 적이 있는 아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여 내일 할머니께 물어본다며 달래서 재우고 났는데 뭔가 불길한 마음이 싹~ 스치고 지나겠다. 나는 책상 위를 뒤져서 접힌 안내장을 찾아냈다.
00 유치원 학보모 공개수업 안내
아뿔싸! 뭔가 큰 망치로 머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일시는 야속하게도 오늘 오전이었다. 나는 어두운 방에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얕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아이는 외할머니가 온다는 약속을 기억하며 문쪽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을 것이다. 세상에 자기 아이 공개수업도 잊어버리는 나 같은 게 엄마라니... 한없는 죄책감이 밀려와서 한참을 그렇게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두운 방에서 흐느꼈다.
다음 날 유치원 담임선생님께 전화하니 "그날 안 온 어머니가 또 있으셨어요 그래서 00과 다른 아이 손을 잡고 2부 학예회로 학교 강당으로 이동했어요. 00 이가 울지 않고 씩씩하게 잘 있었어요 " 라며 밝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미 지난 일로 죄책감에 밤을 지새웠을 학부모를 위로하는, 선생님의 하얀 거짓말을 조금 보탠 따뜻한 위로였다.
그 이후 유치원을 졸업할 때까지 충주에 근무했던 나는 아이 학예회, 공개수업, 졸업식에 가보지 못했다. 그 자리는 나름대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예쁘게 차려입은 외할머니가 대신하였다. 첫째 아이도 엄마는 어차피 못 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찍은 아이의 사진에 아이의 웃는 모습은 거의 없다. 모르겠다. 그날 엄마가 약속을 어긴 것 때문일까 아니면 한 번도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한 유치원 행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우리 아이의 성향이기 때문일까
다행히 2년 후 청주로 발령받아 아이와 같은 학교에 근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의 아이에 대한 미안함은 두고두고 괜히 다른 것으로 보상하게 만드는 큰 빚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은 없고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서 돌아오면 아무리 귀찮아도 일어나서 수고했다 말해 주고 가방 받아주기, 용돈 되도록 꼬박꼬박 넣어주기 뭐 그런 것이다.
이제는 중학교 1학년이 되어 공부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도 가족이 모여있는 거실이 불편하다며 자기 방으로 쓱~ 들어가 버리는 사춘기 청소년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외친다. "아들~ 그 방이 더 더워! 거실이 더 시원해 여기 나와서 핸드폰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