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야기>
“우리가 같이 보냈던 좋은 시간만… 기억해 줘.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남자가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순간, 삶이 끝났다는 걸 느낀다.
사랑이 가짜였음을,
자기 인생이 가리가리 찢겨 나가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랑은 먼지처럼 휘날려 사라지고,
결혼은 끝장났다.
남자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닥을 응시한다.
여자의 검은 눈동자는
그의 정수리를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상상한다.
남자의 정수리에 쇠못을 박는 장면을.
피가 동서남북으로 번지는 잔혹한 환상.
그런데 이상하다.
그 장면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그녀의 눈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웃고 있다.
…
2년이 지났다.
이번엔 여자의 차례였다.
“우리… 좋았던 시간만이라도 기억해 줘.
나도 당신 용서했잖아.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여자는 남자에게 고개를 들어 묻는다.
그녀의 눈동자에 약간의 흔들림이 있다.
남자는 침묵한다.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공포 때문일까.
그녀의 입술이 유난히 빨갛게 보인다.
마치 화장한 것도 아닌데,
붉고 젖어 있다.
남자는 충동을 느낀다.
그 입술을 씹고 찢어버리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 파괴하고 싶은 욕망.
처음 겪는 감정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다.
그녀의 눈 속에서,
자기 전처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 여자의 눈.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던 시선.
복수인지, 애정인지, 모호했던 그 시선.
여자가 속삭인다.
“나… 기억나지 않아?”
순간, 남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건 지금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처의 목소리였다.
그가 죽음으로 떠밀었던 그 여자.
“그날 밤…
당신이 밀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 살아 있었겠지.”
남자는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그건—그건 너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그 여자는 웃는다.
“난 사라지지 않았어.
넌 나를 묻었지만,
이 여자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남자의 두 눈이 벌어지고,
혀끝이 마르기 시작한다.
공포가 올라온다.
현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말한다.
“우린 부부였잖아.
이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죽음에서라도.”
남자는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입이 굳는다.
혀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가 다가온다.
붉은 입술이, 피처럼 번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깨닫는다.
사랑의 끝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