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으로 불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1부 2005년-2009년>
누구도 태어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손가락질하는 하루살이로 살 것인가, 손가락질당하는 하루살이로 살 것인가.
모든 것은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한강을 건너는 신사역 전철은 눈부신 햇살 속을 가르며 땅 위로 솟아오른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은빛 강물 위로 고래 한 마리가 떠오른다.
숨을 쉬려 수면 위로 올라와,
햇살 속에 물을 내뿜고는 다시 어둠 아래로 가라앉는다.
남자는 그 우울한 고래를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열심히 사는 것과 돈 버는 건 별개야.”
옥수역.
무표정한 얼굴들이 흘러나오고,
권태의 냄새가 플랫폼을 채운다.
삶은 복잡하지 않다.
그놈이 그놈이고,
습관처럼 태어나 습관처럼 죽어간다.
남자는 미닫이문을 열고 선술집으로 들어선다.
젖은 등줄기를 간질이는 에어컨 바람.
벽엔 낙서가 가득하다.
‘소정아, 영원히 사랑해’,
‘오늘도 버틴다’,
‘26살, 내 청춘, 열심히 살자.’
누군가에겐 기억, 누군가에겐 낙서.
남자는 그것들을 바라보다,
그 중앙에서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본다.
동창회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여자.
소주잔이 부딪힌다.
쌉쌀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오늘은 내가 살게.
너보단 돈 잘 버는 것 같아서.”
여자의 말끝에 묻어난 웃음.
남자는 당황했지만 속내를 숨긴다.
“고맙다. 넌 무슨 일 하길래 그렇게 잘 벌어?
여자한텐 쉽지 않을 텐데.”
“분양. 들어봤어?”
“분양? 처음 듣는데?”
“용인 동백 쥬네브 몰. 요즘 핫해.
신문도 안 봐?”
남자는 멋쩍게 웃는다.
“너 하는 일, 나도 해볼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쉽지. 누구나 할 수 있어.
근데 너같이 배운 사람한텐 안 맞아.”
여자는 말한다.
IMF 끝자락, 동대문 원단 도매상에서 일하던 시절.
밀레오레 앞에서 전단을 나눠주던 분양팀.
사장이 그걸 집어 들고 네 개의 점포를 계약했고,
그날 그들은 그녀의 연봉을 넘는 수수료를 받아갔다.
그날 이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고.
술잔을 든 여자가 말한다.
“나는 술잔에 외로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돈 없어서 조마조마한 그 외로움.”
남자는 그녀를 바라본다.
백수다. 출판사 친구 사무실에 기웃거리다,
수원 친구 따라 부산까지 물건 나르며 용돈을 번다.
아내 덕에 겨우 연명하는 놈처럼 보일지도.
실패한 인생.
그런데도 그는 가볍다.
여자는 남자의 표정을 보며 생각한다.
‘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데,
이 자식은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
“야, 힘내.”
“고맙다. 너도.”
소주병이 하나둘 늘어난다.
말도, 술도, 점점 깊어진다.
문득 남자가 교회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 아니야.
방관자야. 침묵의 신.
복종을 강요하는 신이지.”
그의 말은 점점 격렬해진다.
술 때문만은 아니다.
체념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피어난다.
여자는 말없이 듣는다.
그녀 역시 교회를 다녔다.
헌금 강요에 지쳐 떠났던 기억이 있다.
“사랑?
그건 감정의 유희야.
욕망의 장식일 뿐이지.”
남자가 소주잔에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본다.
여자가 웃는다.
하지만 남자는 진지하다.
“신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결국은 조건이야.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때만,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거지.”
여자는 문득 떠오른다.
첫사랑. 유부남이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녀는 믿었다.
끝내 그는 가족을 택했고,
그녀는 모멸감을 안고 떠났다.
남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도... 부동산 해볼까?”
“그래. 해봐라.”
밤은 깊어진다.
소주병은 탑처럼 쌓인다.
내일 아침이면 기억나지 않을 이야기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또렷하다.
여자가 계산을 마치고 나온다.
남자는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든다.
네온사인이 흘러내리는 밤거리.
여자는 그의 손짓을 보며 생각한다.
‘저 놈은... 절박함이 없어.’
“노래방 갈까?”
“좋지.”
여자가 남자 팔에 팔짱을 낀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이 팔에 닿는 걸 느낀다.
밤하늘엔 흐드러진 불빛들.
인생은, 언제나 유혹처럼 시작된다.
어딘가로,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부동산학 박사.
실무와 이론을 넘나들며 한국 부동산의 민낯을 기록해왔다.
이제는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국내 최초의 부동산 장편소설로
사람과 욕망, 도시와 붕괴의 서사를 담아낸다.
진짜 이야기는 숫자 뒤에 숨어 있다. 그래서 소설이 시작된다.
2장. 계약의 유혹
분양사무실, 그곳은 꿈을 파는 시장이었다.
누군가는 현금 가방을 들고 들어왔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무너졌다. 서류 한 장에 이름을 적는 순간, 누군가는 삶 전체에 도장을 찍었고, 그는 돈을 벌었다.
※ 다음 장은 집필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조정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