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전전전남친 장례식

첫 번째 남자(5) 여배우 매니저, 31세

by 무아예요

::공일오비 - 슬픈 인연::


16

그가 나의 전전전전남친이 됐을 때쯤이었다. 난 새로운 남자 친구와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그의 번호와 비슷했다. 이제야 내 생각이 났나? 하여튼 남자들은 웃겨.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소천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소천하셨다.

그가 죽었을 리 없다.


처음에는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상을 당하셨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소천하다‘라는 말에 죽었다는 뜻이 아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명이인일 거라는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죽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는 이미 내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죽었지만, 막상 죽었다는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밥을 잘 먹고 헬스장을 다니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사람이 죽었을 리 없다.


자살일 리 없다. 그는 죽고 싶다는 말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교통사고일 리도 없다. 그는 작은 사고도 낸 적 없었다. 요새 택배나 청첩장이나 부고 문자로 보이스피싱도 한다는데...


사실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죽었구나.


17

문자에 있던 링크를 눌러보니 지인들이 이미 화환을 보냈다. 댓글 같은 것도 몇 개 있었다. 그중에는 그가 가끔 꺼낸 이름, 그에게 종종 전화를 걸 때 보였던 이름, 그가 담당했다던 연예인의 이름, 전에 일한 소속사 이름, 그곳에 소속된 신인 배우의 이름, 건너 건너 아는 매니저의 이름도 보였다.


나는 장례식장 위치를 확인하고 잠시 고민했다. 내가 전전전전남친의 장례식에 가는 게 맞는 걸까? 장례식에 가서 날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사이에 결혼해서 아내가 있으면 어떡하지? 여자친구가 있으면 내가 민폐 아닐까?


다른 전남친이었다면 이렇게 고민을 안 했을 수도 있다. 몇 번째 전남친이든 죽었다고 해서 그 장례식에 전부 다 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그는 특별하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을지라도, 난 그의 전전전전여친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죽은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으니 우리는 철저하게 남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부고 문자도 못 받을 수도 있던 것이다. 헤어진 뒤 나는 그의 번호를 바로 차단했고, 그는 내 번호를 지웠으니까.


아마 헤어지고 나서 내가 술에 취해 연락했던 일 때문에 기록이 남은 것 같다. 다행이다. 죽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 다행이다.


만약 부고 문자를 못 받았다면 나는 평생 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가 새로운 여자친구의 피를 말려 가며 회피하는 연애만 반복하다 혼자 살거나,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모습까지 상상했겠지.


앞에 앉아있던 남자친구가 무슨 일이냐며 걱정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문자를 본 순간부터 휴대폰만 보느라 밥도 못 먹고 있었다. 내가 부고 문자를 받았다고 말하자 남자친구가 물어봤다.


"장례식장 가야 돼?"


나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곧바로 눈물이 났다. 남자친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안아주었다. 그와는 정반대인 사람이다.


그렇다. 난 이미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18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밥 먹다가 자려다가 일하다가 길을 걷다가. 뭐가 슬픈지는 나도 모른다.


그와 연애하는 동안 혹은 헤어지고 나서 슬펐던 느낌과 달랐다. 사실 지금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한 번씩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은 전남친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싱숭생숭하다 어쩐다 한다던데, 차라리 평생 욕할 수 있게 잘 살기나 할 것이지. 죽긴 왜 죽어서 날 또 힘들게 하는 건지.


넌 끝까지 나쁘다.


발인을 앞둔 새벽, 그의 부고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죽지 말라면서 왜 죽어. 죽지 마.’ 이런 내용의 짧은 문자를 서너 통 남겼다.


다음 날 그의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의 아버지였다.


“우리 아들이 하늘나라로 갔어요. 소식을 모르고 문자 보내신 것 같아서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