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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남자 달라질 수 있어요

첫 번째 남자(4) 여배우 매니저, 31세

by 무아예요

::오지은 - 그대::


12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혼자였다. ‘사람을 믿지 않겠다.’ 던 다짐을 정말로 지켜내며 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고, 내 멋대로 ‘외롭다’는 뜻으로 여태 받아들였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정이 들지 않을까?

그래도 어떻게 평생 혼자 살겠어.

그래도 사람인데.


나는 끝까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해 주기로 다짐했다.


그가 ‘사람을 믿지 않겠다’라고 한 말이 사실은 ‘사람을 믿고 싶다’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길 바랐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3

길을 걷다 과일 가게에서 파는 복숭아가 보였다. 가장 먼저 그를 떠올리곤 예쁜 복숭아를 골라 정성스레 깎았다.


과일 깎는 솜씨가 서툴러 복숭아를 하나 더 잘라서 그중 반듯한 것만 통에 담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에게 복숭아를 건네자 그는 쳐다도 안 보고 말했다.


”다음에 먹을래. 귀찮아.”


나는 복숭아 통을 다시 그대로 집에 가져왔다. 복숭아를 먹으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1. 사랑을 받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2.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는 날 사랑한 적 없다. 복숭아를 받아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도 그를 사랑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원하지도 않는 복숭아를 주려고 했으니 말이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복숭아 통을 비워냈다. 이제는 내가 불쌍하다. 나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새로운 결심을 했다. 그가 원했듯 그를 철저하게 혼자로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때부터 우리의 관계는 안정을 찾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니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로워진 건 나였다.


14

나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걸 바란 거지?]

[나 없으니까 좋지?]

[도대체 날 왜 만났어?]

[그냥 평생 혼자 살아]


그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역시 난 연애랑 안 맞는 듯]


싸가지 없는 호랑이 새끼. 나는 곧바로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 이제는 눈물도 나질 않는다. 그리워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 나는 정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명복을 빌었다.


15

호랑이 새끼를 떠나보내곤 내가 호랑이 새끼가 된 듯 이기적인 연애만을 반복했다.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연애불구가 되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들이 다 병신 같았다. 그 사람처럼 완벽한 남자는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병신처럼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완벽한 사람이 어딨겠나. 그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숨겼을 뿐이다. 약해질 때마다 도망쳤던 것이다. 이기적인 새끼. 겁쟁이 새끼... 도대체 왜 그렇게 외롭게 살까?


나는 여전히 한 번씩 그가 걱정됐다. 그의 생각에 못 이겨 술을 진탕 마시고 전화를 걸었다.


“누구세요?”


나라고 말하자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업무 전화가 왔다며 끊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했다. 역시 나 혼자 아련했구나. 나 혼자 진심이었지. 도대체 내가 뭘 기대한 걸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매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며칠 뒤에 왜 연락했냐며 문자가 왔다. 나는 ‘나 다 때려치우려고.’라고 보냈다. 괜히 괘씸한 마음에 그가 싫어하는 말로 그를 괴롭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관둔다, 포기한다, 죽고 싶다 같은 말을 가장 싫어했다.


[약한 소리 하지 마]

[그딴 말할 거면 연락하지 마]

[그냥 아무것도 보내지 마]


그 뒤로 정말 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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