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남자 이야기(6) 여배우 매니저, 31세
::비틀즈 - Golden Slu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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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는 그가 죽은 걸 모르고 연락한 지인이라고 생각해 친히 전화를 해주셨다. 그와 목소리가 똑같았다.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라며 설명을 해드린 뒤 30분 정도 이야기를 더 나눴다.
“암이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도 암 많이 걸린대요.”
아버지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프다는 말을 끝까지 안 했다고, 마지막 수술을 하고 나서야 아프다고 말했다고, 휴대폰 비밀번호 패턴을 어렵게도 해두었다고,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고, 다들 오래 울다 갔다고.
놀랍거나 새로울 건 없었다. 왠지 다 알고 있는 말을 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모든 걸 보여주려 하지 않았지만, 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나 보다. 그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척해도 참 뻔하다.
내가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엄청 잘해주잖아요.’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애죠.’라고 말씀했다. 그가 자주 하던 말과 똑같았다.
“난 좋아하는 사람한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 말을 할 때마다 뒤에 꼭 붙여서 하던 말이 있다.
“넌 그러지 마. 그렇게 사람 너무 좋아하면 안 돼. 사람 믿는 거 아니야. 계산하고 이기적으로 살아."
그는 나에게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한테 왜 자꾸 사람을 믿지 말라는 건지, 자기는 왜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건지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가 ‘사람을 믿지 않겠다.’라고 한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다정했다. 적어도 나에겐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정하게 굴어놓고 꼭 후회하고, 그러면서 또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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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통화를 마치려다가 영정 사진은 어떻게 하셨을지 궁금해졌다. 그는 사진 찍기 죽도록 싫어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사진을 구하셨을까 싶었다. 나는 그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은 사진을 찾아서 보내드리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구글 드라이브에 들어가 한참 스크롤 해서 내려보니 그의 사진이 간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셀카 한 번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다. 그가 제대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사진도 한 장 없었다.
그의 뒷모습, 거울에 비춘 모습, 흔들린 모습 몇 장은 있었다. 그의 사진을 남김없이 모조리 저장해 아버지에게 문자로 보내드렸다.
[사진 고마워요.]
아버지의 답장을 보고 다시 한번 그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진 몇 장에서도 그는 빛났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좋아했는지 다시 봐도 잘 알겠다. 이렇게 멋진 얼굴만 남기고 떠났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던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는 그가 도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하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그보다 훨씬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그렇게 내 속을 썩이던 그가 끝까지 내 속을 뭉그러뜨린다. 날 이토록 힘들게 만든 그에게 복수를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호랑이가 떠났다. 붙잡으려고 해도 꼬리를 자르면서까지 도망가던 호랑이 새끼. 이젠 붙잡을 수도 없이 영영 떠났다.
나쁜 호랑이 새끼. 정말 나쁘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절대 호랑이 새끼 같은 남자와 연애하지 않겠다. 이제 내 인생에서 호랑이 새끼는 그 사람 하나뿐이어야 한다.
1월 1일 내일은 그의 생일이다.
5년 전 오늘 미역국과 국거리 소고기를 샀다.
그리고 오늘 그에 대한 글을 마쳤다.
그가 죽었는데 내가 슬퍼도 될까?
사별도 아닌 주제에
몇 년 전 헤어진 전전전전남친의 죽음은
도대체 얼마나 슬퍼도 될지 모르겠다.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얼마나 빛났는지 얼마나 다정했는지
뭐라도 남길 수 있다면
그토록 사진을 찍기 싫어했으니 글이라도 써야지.
맨날 나쁘다고 밉다고 울기나 하고
정작 해준 건 하나도 없으면서
지금도 하는 거라곤 당신에 대한 글을 쓰는 것뿐이다.
하여튼 넌 끝까지 나쁘다.
왜 하필 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