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남자 이야기(0) 프롤로그
::장기하와 얼굴들 - 괜찮아요::
1
어느 연애 프로그램에서 두 남녀가 데이트를 하다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 주말에 보통 뭐 하세요?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 저도 영화 자주 봐요
어머 저랑 취향이 같네요
그리곤 취향이 같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들이 정말 취향이 같아서 호감을 가진 걸까? 영화를 보는 것 자체를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2
취향이란 뭘까? 나는 방송 일을 하면서 취향에 관한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우선 취향은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든 그걸 온전히 방송에 녹여낼 수 없다. 그건 내가 핫바리라서만은 아니다. 메인 작가님, 메인 피디님, 국장님, CP님도 개인의 취향을 방송에 100% 드러내기 어렵다. 시청자가 있고, 출연자가 있고, 협찬이 있고, 제작진들이 있는 한 방송에 개인의 취향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취향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취향이 아주 조금씩 합쳐져서 방송이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취향으로부터 기획되고, 작가나 피디 말고도 촬영 감독의 취향으로 그림 한 컷이 만들어질 수 있고, 음악 감독님의 취향으로 노래를 몇 초 넣을 수 있고, CG 감독의 디테일이 들어갈 수 있고, 시청자의 취향(트렌드 같은 것)도, 그리고 내 취향도 녹여질 때도 있다.
그러니까 방송은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이 빚어낸 것이다. 방송뿐만이 아니다. ‘대중적인 것’은 대자본으로 개인의 취향을 모두 합쳐낸다.
‘대중적인 것’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뒤섞여 있다.
그 속에 ‘온전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 그것이 취향이 아닐까?
3
대중적인 것에서는 취향을 찾기 어렵다. 너무 많은 취향이 뒤섞여있기 때문에 걸러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취향을 찾고 싶으면 대중적인 것보다 인디씬에서 찾는 편이 낫다. 인디씬에 있는 것들은 소자본인 만큼 개인의 온전한 취향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디씬에서 탄생한 취향이 길러져서 대중적인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취향을 알고 싶었다. 일하면서는 내 취향을 찾거나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목말랐다. 그래서 매일 인디 음악을 듣고, 인디 영화를 보고, 신인 작가들의 소설과 시를 읽었다. 이건 ‘인디씬’ 자체를 즐겼다기 보다 ‘취향을 찾는 행위’일 뿐었다.
4
‘인디씬’ 자체가 취향이 아니다. 내 취향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을 찾기 위해 인디 씬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나는 매일 내 취향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그리고 내 취향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카페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찾아다니고, 잘 모르는 와인과 위스키를 찾아 마셨다. 도서관, 서점, 중고 책방에 들러 신간을 확인했다. 많이 걸었고, 택시는 절대 타지 않았다.
주로 유니클로, COS, 그리고 무인양품에서 옷을 사 입었다. 디자인이나 색상을 따지기보다는 독특한 핏이나 재질을 좋아했다. 발목까지 덮는 치마, 문양이 없는 린넨 원피스, 통이 넓은 청바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염색이나 파마는 안 한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청담동까지 가서 5~6만 원 주고 디자인컷으로 단발 레이어드 머리를 유지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꼭 전국의 영화관 두세 군데 정도에서만 상영했다. 하루에 한 타임 정도, 주로 평일 오전 시간이나 밤늦게 봐야 했다. 그것마저 놓치면 다음 주 언제 상영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학도라거나 영화 종사자를 꿈꾼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취향이 그랬다.
내가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내 취향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취향을 찾아다니며 그 중에 어떤 것이 정말 내 취향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취향을 찾아다니는 것까지가 내 취향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 취향이 있었다.
그리고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