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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좋아하는 여자와 술 안 마시는 남자

두 번째 남자 이야기(2) 잡지사 에디터, 30세

by 무아예요 Jan 17. 2025

::김사월 - 로맨스::


8

내가 그의 취향과 다르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가 영화 <블랙위도우>를 꼭 봐야 한다며 함께 보러 갔다. 난 마블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의 취향이 같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그와 함께 보면 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마블은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내가 왜 마블을 안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또, 나는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에세이를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에세이 책을 몇 권 빌려주거나 사주었는데 사실 전부 읽다 말았다. 


취향이 다르다고 느낀 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나는 한여름과 딱 어울리는 ‘핸드릭스진’을 사놓곤 그에게 토닉과 함께 내어준 적이 있다. 하지만 썩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해창 막걸리, 발베니, 아란, 비싼 레드와인들도 그는 몇 입 먹고 말았다. 


9

취향이 같다고 해서 연애를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연애한 지 한두 달쯤 지나자 함께 볼만한 영화도 다 보았다. 함께 먹을 만한 음식도 다 먹고, 마실 만한 술도 다 마셨다. 우리는 더 이상 취향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없어졌다. 


그리고 곧 헤어졌다. 


우리는 취향이 있다는 것만 같았지, 취향 자체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취향인 줄 알았다. 그를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취향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그래서 ‘취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취향이 같다.’라고 착각했다.


10

그와 헤어지고 1년이 지나서야 문득 그가 생각났다. 그러나 짧은 연애였던 만큼 그를 떠올릴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엄청난 추억도, 그에 대한 악감정도, 그리움조차 없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그가 종종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브런치에서 사용한다는 필명을 알려준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검색해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쓴 글들을 찬찬히 읽다 보니 그의 말투와 목소리가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나에게 했던 말들이 보였다. 그때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의 취향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 몰랐구나. 그 취향을 갖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고, 그 취향을 갖게 된 이유는 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는 생각보다 브런치에 꽤 많은 글을 남겼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수두룩 해서 그가 더 낯설어졌다가 또 읽다 보니 그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취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나를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며 홍대에 살던 그때를 참 예쁘게도 묘사했다. 나도 잊고 있던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생생하게 글로 남겨주었다. 


11

사실 지금은 취향이 없다. 홍대에 살지도 않는다.


그가 쓴 글에 기록된 것처럼 그때 나는 ‘취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취향이 될만한 것을 계속 찾아다녔다. 취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심하며 해보지 않은 것과 새로운 것을 선택했다. 


밥 한 번 먹더라도 '그냥 대충 아무거나' 하질 않았다. 

그런데 서른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냥 대충 아무거나’ 다 한다. 


인디 음악도 듣고, 다른 음악도 다 듣는다. 독립영화도 보고, 다른 영화도 다 본다. 시집도 읽고, 다른 책도 다 본다. 아이돌 음악, 틱톡 음악, 트로트 음악, 좀비 영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웹툰, 주식 책... 지금은 그냥 다 한다. 예전에는 내 취향만 좇느라 쳐다도 안 봤던 것들인데 말이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내 취향이 뭔지도 모른다. 취향이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 건지도 모르겠다. 취향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곧 취향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12

취향은 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얼마 전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요새 술맛을 알았다며 나와 함께 먹었던 술들이 종종 생각난다고 했다. 해창막걸리가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배송도 시켰다며 사진도 보내왔다. 나는 요새 술값이 비싸서 그냥 소주 마신다고 답했다.


나도 뒤늦게 그 남자 덕분에 취향의 영역이 넓어졌다. 나는 그가 선물했던 에세이 책을 뒤늦게 읽곤 에세이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김영민 교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만큼 나도 김영민 교수의 팬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김영민 교수의 신간이 나오면 모두 사서 읽는다.


술을 안 마시던 그가 술을 잘 마시게 됐다. 

그리고 에세이를 안 읽던 내가 에세이를 쓰게 됐다. 


나는 에세이를 읽다 보니 나도 글을 쓰고 싶어 졌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내가 쓴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갑자기?', '왜?', '네가?', '할 수 있겠어?', '아무나 하는 일 아니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이유 없이 내 전화를 처음 받아준 그날이 생각났다. 내가 그때 그와 취향이 같다는 이유로 연애를 한 게 아니었구나. 그와 연결된 순간부터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구나. 


나는 그의 말에 용기를 내어 글을 하나 완성했다. 그리곤 가장 먼저 그에게 보내주었다. 


13

취향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취향은 취향을 확장시킨다. 

취향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킨다.

취향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


그래서 나는 취향이 같든 다르든 취향이 있든 없든 연결되고 싶은 사람에게 묻는다. 


"취향이 뭐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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