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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남자는 골치 아파

세 번째 남자(2) 신원 미상 옆집 남자

by 무아예요

::요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 사랑의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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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약속이 있어서 헬스장에 가지 않은 날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술집이 밤 10시에 닫을 때라 딱 한 시간 동안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취한 것도 아니고 안 취한 것도 아닌 채로 벌써 10시가 다 되었다. 2차로 갈 수 있는 데도 없으니, 그대로 자리를 애매하게 마무리했다.


이렇게라도 밖에서 술을 마신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집까지 터덜터덜 천천히 걷다가 또 그를 마주쳤다.


옆집남자다.


그는 또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담뱃재를 탁탁 털어버리곤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다시는 그를 마주치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동네 사람이라 그런지 왠지 반가웠다. 나는 그에게 ‘집에 담배 냄새 들어오니까 꺼지세요.’라며 장난을 쳤다. 그는 나에게 취했냐고 묻더니, 날 보니까 자기도 술을 마시고 싶어 진다고 말했다.


“방금 오면서 치킨 시켰는데 치맥 할래요?”


그리고는 느닷없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어디서요?’ 물어봤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턱으로 자신의 집을 가리켰다. 내가 미쳤냐며 집으로 가려고 하자 그는 바로 ‘그럼 그쪽 집에서 먹을까요?’라고 말했다. 그걸 지금 배려랍시고 한 말인가? 황당해서 아무 말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만 봤다.


“솔직히 술 더 마시고 싶잖아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치킨만 먹고 가요.”


어쩌면 그 말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 난 어느새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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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은 넓고 좋았다. 우리 집의 두 배 정도 컸다. 내 자취방에 없는 텔레비전도 있었다. 그것도 텔레비전이 있는 방이 따로 있었다. 그가 없을 때 혼자 와서 쉬다 가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우리 집을 보여줄 생각이 있던 건 아니지만 더더욱 보여주지 않길 잘했다 생각했다.


사실 집 자체는 그냥 어느 오래된 주택일 뿐 그냥 조금 넓었을 뿐이다. 집이 좋아 보였던 이유는 인테리어가 특히 남달랐기 때문이다. 문고리, 전등, 전등 스위치 모두 평범한 자취방에 있을 법한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 손을 본듯했다. 오늘의집도 아니고, 어느 힙한 카페에서 떼어온 듯한 것들이었다.


살짝 열려 있던 침실 안에 꽤 큰 책장이 보였다. 그는 책장에 책과 LP들도 그냥 꽂아두지 않았다. 색감과 크기까지도 조화롭게 고려한 듯 책장 자체가 하나의 인테리어 같았다. 책 몇 권과 LP 몇 개는 전시하듯 오브제와 함께 소품처럼 놓아두었다.


나는 그의 침실로 들어가 어떤 책과 LP를 좋아하는지 살펴보았다. 누군가의 책장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몇 권과 패션 잡지, 인테리어, 뇌과학, 심리 분야 다양하게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 어디에서 봤던 책들이었다. 대개 베스트셀러 칸에 있는 표지가 예쁜 책들 혹은 카페에 하나씩 꼭 있는 그런 책들 말이다.


책장을 구경하는 동안 그는 침대에 앉아서 날 쳐다보았다. 모르는 남자의 방에서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괜히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끼곤 얼른 침실을 나섰다. 그에게 ‘책 별로 안 읽죠?’라고 묻자 그는 어떻게 알았냐며 웃었다. 그는 책은 별로 안 읽지만 책은 좋아했다. 그리곤 내가 글 쓰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인테리어 시공을 하는 회사를 운영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인테리어 시공을 한다는 감각적인 사람들의 계정을 몇 번 본 적 있는데, 실제로는 처음 만났다. 그가 인테리어 시공을 맡았다는 가게 이름을 몇 군데 알려주었다. 홍대 인근 몇몇 식당과 카페였다. 그중에는 내가 자주 가는 카페도 있었다. 나도 왠지 그 의 직업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순간적으로 이 남자와 사귀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그에게 관심이 갈 뻔했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인테리어가 멋지다는 이유로, 그리고 직업이 새롭다는 이유로 갑자기 호감을 가지는 건 좀 이상하니까.


우리는 그저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뿐이다. 옆집에 산다는 우연과 서로에게 흥미로운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을 빼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사이 같았다. 예전에는 이 정도의 이유만으로도 연애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결말을 잘 알고 있다. 결국 한두 달 만나다가 ‘그 정도 마음은 아닌 것 같아. 미안. 헤어지자.’ 라며 서로 쿨하게 헤어지겠지.


게다가 그런 뜨뜻미지근한 전남친이 옆집 남자라면 더 골치 아파질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도 조절할 수 있는 지경에 왔구나 싶어서 뿌듯했다.


딱 친구. 동네 친구.

옆집 사는 남사친 정도로만 선을 지켜야겠다.

난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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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남자의 집에서 옆집 남자와 함께 영화를 함께 보며 치킨과 맥주를 먹었다. 그는 최근에 보고 싶던 영화가 왓챠에 올라왔다며 <죄 많은 소녀>를 틀었다. 이미 영화관에서 봤지만,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반가워서 기쁜 마음으로 다시 봤다.


"저런 영화 만들고 싶다."


그는 원래 영상영화과에 다녔다고 했다. 영화감독이 되자니 어딘가 두려운 마음에 진로를 변경했다고 했다. 나도 사실 영화를 만들고 싶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가 되자니 두려운 마음에 진로를 변경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분명히 예술을 좋아하지만,

예술 비슷한 일을 하는 듯하면서 엄연히 예술은 아닌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인테리어 시공을 통해 어느 정도 창작은 하지만 결국 자기 것을 만드는 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방송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창작은 하지만 결국 내 것을 쓰는 건 아니다.


이건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예술가만큼 슬픈 사실이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예술이 없어서 예술 비슷한 일로 돈을 번다는 것.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

그만큼 확실한 재능이 없다는 것.


우리는 예술은 하고 싶지만 예술을 하지 못해 슬픈 사람들이었다.


애매하다.

그런 우리도 우리의 관계도 그만큼 애매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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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우리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5분 글쓰기.


이건 내가 남자와 술 마시다가 심심해질 때마다 하던 일이다. 5분 뒤 알람을 맞춰놓고 메모장에 아무 글을 남기는 것이다. 이 남자는 5분 동안 꽤 집중해서 글을 써 내려갔다. 나는 이 남자와 계속 예술을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하면서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람이 울리고 서로가 쓴 글을 바꿔 읽었다.


[하늘색 니트를 입은 단발머리의 옆집여자가 내 방에서 책장을 구경하고 영화를 보며 치맥을 먹고 내 앞에 앉아 5분 글쓰기를 하자고 하고... 묘하다. 그녀가 궁금하다.]


이런 초등학생이 쓴 일기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를 친구라고 규정해도 그는 나를 친구가 아니라 여자로 보고 있었구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으라고 했더니 웬 나에 대한 묘사만 가득 적어두었는지. 그것도 엄청 디테일하게 말이다. 나는 그 변태 같은 디테일함에 무서워졌다.


갑자기 술이 확 깼다. 하필 그때 당시는 몰래카메라 관련한 성범죄 이슈가 연달아 나오던 때였다. 내가 여태 사회가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구나. 생각해 보니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이 집에 따라온 거지? 아무리 내가 이 사람을 동네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 사람이 날 덮치면 끝인데?


그래. 덮칠 수는 있어... 그런데 이 사람이 살인자면 어떡하지? 어떻게 죽이려나? 아프게 죽는 건 싫은데... 카메라 있나? 문 잠겨 있는 거 아니야? 이 남자 말고 다른 사람 또 있는 거 아니야?


우선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겠다. 나는 급하게 가방을 챙겨 그가 화장실로 간 사이에 집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문이 잠겨있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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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한 뒤 가방에서 그의 책을 발견했다.

아까 책장을 구경하다가 읽어보려고 꺼내두었던 책을 그대로 가방에 넣은 것이다.


내가 너무 취했나?


인사도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내 직감을 무시해선 안 된다. 어쩌면 그가 나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나쁜 일을 당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얼른 도망가는 편이 낫다.


그 나쁜 일이라 함은...

성범죄, 살인, 그리고 옆집남자와 골치 아픈 관계로 남는 것.

뭐가 됐든 옆집 남자와 엮이면 나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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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내 직감을 믿고 있었는데, 나는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옆집남자가 생각났다.


내가 오버했나 싶기도 하고.

동네 친구 하나를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우리는 전화번호도 교환하지 않았다. 가져온 책을 그의 집 앞에 두고 갈까 하다 언젠가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면 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달 넘게 마주치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너무 관계에 대해 속단하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그와 좋은 인연이 됐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연히 만나면 제대로 술 한 잔 하자고 말해야겠다.


그리곤 드디어 그를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곤 어떻게 인사를 할까 고민하는데, 그가 휙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여쁜 여자의 허리를 감싸며...


뭐야. 여자친구 있었어? 그래. 저 남자 정도면 저렇게 예쁜 여자나 눈에 들어오겠지. 근데 여자친구도 있는 사람이 나한테 왜 저랬대? 그 사이에 생겼나?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야.


아닌가?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나?

그런데 이 책은 어떻게 하지?






















처음 만난 종류의 남자를 어떻게 구분하고 규정해야 할지 모르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스물 초반까지는 연애 혹은 친구로 이어졌는데,

친구가 될 수 있던 사이가 한두 달 연애로 끝나는 게 아쉽더라고요.

그렇다고 친구로 먼저 단정 지어봐도 딱! 친구가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사귀거나 친구로 지내거나.

아직 잘 모르겠으면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 애매함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책을 훔쳐서 달아나 버렸죠.


근데 또 지나고 보니

그런 애매한 사이를 즐길 때가 오더군요.


"우리 도대체 무슨 사이야?" 라고 물어보게 하는 오빠들마다

"그냥... 좋은 사이지." 라고 대답하는 말을 절대 이해 못 했거든요.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싶은 마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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