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남자(2) 여배우 매니저, 31세
::검정치마 - Holly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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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새끼와의 연애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는 매일 우리 회사 앞으로 와선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항상 날 '애기'라고 부르며 매번 새로운 식당에서 밥을 먹였다.
"우리 애기 오늘 매운 거 먹고 싶었지?"
오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아는지! 그런데 사실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었다. 하지만 먹고 싶었던 게 어떤 거였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항상 가장 좋은 곳으로 날 데려갔다.
그는 따로 맛집을 검색하지도 않고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고도 어디든지 갔다. 난 어디로 갈지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조수석에 앉아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는 조용히 창문을 내려주었다.
압구정 변강쇠 떡볶이, 마포 을밀대 평양냉면, 신사돈까스, 배우 이민기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매운갈비찜집. 가끔은 서울을 벗어나 장어 먹으러 일산으로, 빵 먹으러 수원으로, 닭갈비 먹으러 춘천으로, 고등어회 먹으러 제주까지도 갔다.
어딜 가나 그의 단골 식당이 하나씩 있었고, 식당에 가면 사이드까지 완벽하게 알아서 주문했다. 난 어떤 메뉴를 먹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그가 정해주는 대로 먹는 게 가장 맛있었다.
그런데 그는 기분 좋게 밥을 먹다가 가끔 이상한 포인트에서 정색을 했다. 한 번은 음식 사진을 찍다가 그를 찍으려고 했다. 그에게 카메라 렌즈를 비추자 휴대폰을 뺏었다. 그는 어디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갑자기 정색을 할 때가 또 있었다. 내가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항상 비슷한 말을 했다.
"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운전하는 게 재밌어서 하는 거야."
처음엔 부끄러워서 그런가 싶어서 귀여웠다. 난 눈치도 없이 고맙다고 몇 번 더 말했다. 싸해지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더 이상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유가 있겠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항상 조금은 긴장했다.
그럼에도 난 그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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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연예인 매니저가 운전하고 연예인 케어만 하는 줄 안다. 하지만 매니저와 일해보면 안다. 내가 아는 매니저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우선 매니저들은 모든 섭외 연락을 받는다. 담당하는 연예 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게는 하루에 열 건 이상도 연락이 온다고 한다. 방송 말고도 행사까지 생각하면 그럴 법하다. 하지만 혼자 기획안을 검토해 결정하는 게 아니지 않나. 연예인 혹은 회사와 논의하는 것도 또 일이다.
섭외가 성사되어 출연을 하게 되더라도 머리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약서를 확인하고, 촬영 내용을 이해하고, 대본을 연예인에게 전달하고, 제작진과 연예인 사이에서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업무를 한다.
연예인과 회사와 제작진의 돈 문제, 관계, 이미지 같은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손익을 따져 조율하는 일 말이다. 게다가 촬영 때 무슨 옷을 입을 건지, 대기실 컨디션은 어떤지, 주차는 어디에 할지, 물은 챙겼는지, 신발이 불편한 지 않을지 등등 아주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
매니저는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다.
매니저는 모든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매니저는 못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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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런 매니저라는 직업과 딱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내가 만난 남자 중에 가장 센스 있고, 그만큼 예민했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예민해졌다. 운전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신경 쓸 게 더 많았겠지. 나는 비 오는 날마다 그의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케줄 마치자마자 바로 집에 가서 쉬겠다더니 연락이 없었다. 몇 시간 뒤 전화가 와서는 퇴근하려다가 광장시장에 끌려왔다며 짜증을 냈다. 여배우가 먼저 광장시장에 가자고 한 건 아니고, '광장시장에서 빈대떡 먹고 싶다'라고 한 말에 바로 차를 돌렸단다.
이해가 안 돼서 '거길 굳이 왜 갔냐'라고 말하자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통화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끊겼다.
불안했다.
미웠다.
더 이상 전화를 걸 기운조차 없어질 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밤새 그에 대해 곱씹고 나니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가 예민한 기질을 가진 덕분에 센스가 있던 거구나. 상대방의 말에서도 의도를 알아채는 능력이 있던 거구나. 그리고 그 능력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구나.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속내가 이런 거였구나.
내가 그것도 몰라주고 있었구나.
내가 배려 없고 이기적이었구나.
나는 내가 너무 어려서 그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며 자책했다. 그는 잘못이 없다. 사실은 그가 내게서 영영 도망칠까 봐 무서웠다. 그와 헤어지는 것보다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편이 나았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미안하다고, 내가 이해하겠다고 밤새 문자를 보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에게 답장이 왔다.
[넌 날 절대 이해 못 해]
그에 대해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노력도 더 못 해보고 우리의 연애가 이렇게 끝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