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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많은 남자가 끌리는 이유

첫 번째 남자(1) 여배우 매니저, 31세

by 무아예요 Jan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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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남자와는 일하면서 만났다. 모든 것이 허둥지둥 정신없던 막내작가 시절, 촬영한 지 3일이 되어서야 그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도 평소처럼 스탠바이 몇 시간 전부터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돈은 내가 제일 적게 받는데 왜 내가 제일 일찍 일어나야 할까 투덜대면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세워져 있던 하얀색 카니발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나 말고 현장에 이렇게 일찍 나오는 사람이 있다니 반가웠다.


2

그는 여배우 매니저였다. 촬영 전 미팅할 때도 만났고, 촬영하면서 계속 마주치고, 연락도 꽤 했는데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나 보다. ‘팀장님이 저렇게 잘생겼었나?’ 생각하는데, 그가 나를 발견하곤 웃으며 인사했다.


"작가님, 잘 주무셨어요?"


그는 숙소에 갔다가 혹시라도 못 일어날까 봐 차에서 잤다고 말했다. 피곤한 내색도 하지 않고 ‘이 일이 원래 그렇잖아요~‘라며 능글맞게 장난도 쳤다.


지금 보면 참 미련한 짓 같은데, 그땐 그런 그가 참 멋있어 보였다. '어차피 그렇게까지 일해도 아무도 몰라줘. 그냥 적당히 너 할 일만 해.'라고 말하는 어른들과는 달랐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성실한 매니저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다들 열심히 일하지만, 이렇게 센스 있는 매니저는 못 봤다.


우리가 처음 만난 미팅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커피를 주문하러 가는 나를 따라오며 '이런 건 매니저가 해야죠.'라며 디저트까지 알아서 야무지게 주문했다. 촬영 현장에서도 제작진이 할 일까지 도맡아 하며 이래야 저희도 빨리 가죠.‘라고 말했다.


3

하지만 역시 현장에서 로맨스란 없다. 촬영이 시작되고, 우리는 카메라 뒤에 물러서서 함께 걸었다. 등산을 하는 촬영이라 헥헥 대며 산을 올랐다. 잠도 못 자고 찌든 상태에서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 내가 지금 설레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깨닫지 못했다.


그가 생수병을 건네주더니 '산이 좋냐 바다가 좋냐'라고 물어봤다. 바다가 좋다고 하면 왠지 식상해 보이고, 산이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잠깐 고민을 했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전 바다가 좋아요."


‘고등학생 때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국 시애틀에서 20대를 보냈고, 매니저가 되고 싶어서 매니저 일을 시작했고, 꽤 즐거워서 계속 욕심이 생겼고, 영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알면 뭐라도 편할 줄 알았는데 처리해야 할 업무만 늘었고, 그런데 아무도 몰라주고, 일이 너무 힘들어 몇 달 제주에서 지냈고, 매일 서핑할 때가 가장 행복했고...’


그는 바다가 좋다는 말로 시작해 자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나는 산을 오르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의 말을 한 토씨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다 때려치우고 바다 가고 싶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그도 역시 똑같구나 싶었었다. 완벽한 줄 알았던 그가 이제야 인간적으로 보였다.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가 이내 웃음을 그쳤다.


그는 어딘가 초연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픈 건지 허탈한 건지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리곤 티셔츠를 내리면서 가슴팍에 있는 문신을 보여주었다. 영어로 쓴 레터링 타투였는데 크기도 꽤 컸다.


"절대 사람을 믿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는 내게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스스로 새긴 상처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쩐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뒤로 나무들이 빼곡히 보였다.

하늘을 찌르는 듯 뾰족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로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었다.


나는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

그를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4

어느 날, 호랑이가 내게 다가왔다.

호랑이는 인간이 할 상처를 보여주면서 '난 사람 안 믿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호랑이를 안아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진 상처인지, 그럼에도 나에게 왜 다가왔는지, 왜 상처를 애써 보여준 건지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호랑이가 날 잡아먹을지 모른다.

호랑이는 언제 내게서 도망 칠지 모른다.

호랑이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난 당신을 사랑하기로 했다.

호랑이 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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