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남자(1) 순정파, 30세
::박혜경 - 사랑할거야::
1
나는 그와 같은 회사에서 일 년 넘게 일했다. 다른 부서였지만 구내식당에서 종종 마주쳤다.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한 번씩 눈길이 갔다. 한참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다녔지만 그는 멀리서부터 알아챌 수 있었다.
한 번은 그와 거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적이 있다. 그때 그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그 뒤로 나는 그에게 관심을 끄고 살았다. 내가 바람을 피우는 일이 있어도,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는 게 나만의 연애 철칙이다.
2
그를 잊고 살 때쯤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어느 선배가 회사에서 우연히 동창을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창을 술자리에 불러도 되겠느냐더니 나타난 사람이 바로 그 남자였다.
그도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도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그는 문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 맨 끝자리에 앉았다. 시끄러운 술집이었는데도 아무 소리를 안 내겠다는 듯 아주 조심스러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헬창이었다. 그 몸이 다 쇠질로 다져진 덩치였다. 나도 헬스에 푹 빠져 있을 때라 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그런데 그는 좀 많이 진지한 헬창이었다. 해물떡볶이 같은 안주는커녕 술도 절대 먹지 않았다. 앉아서 술 취한 우리를 구경하듯 웃으며 쳐다만 봤다.
근육이 많으면 원래 그런 건지, 그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거북목도 없었다. 두 손은 주먹을 쥔 채로 무릎 위에 올리고 꼿꼿한 자세 그대로 한 시간을 있었다.
그러다 잠깐 자리를 비웠길래 '헬창이라더니 담배는 피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그는 단백질 셰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단백질을 먹을 시간이었다며 편의점에 다녀왔단다.
재밌는 사람이네. 희한하게 난 이런 포인트에서 재미를 느낀다. 나는 그전까지만 해도 말없이 웃기만 해서 재미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우락부락한 남자가 자기 관리한답시고 시간 맞춰 단백질을 먹는다는 게 재밌지 않나? 제때 우유를 마셔야 하는 신생아 같기도 하고.
나는 그에게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말을 걸다가 혼자 잔뜩 취해버렸다. 숙취에 절어서 회사에 출근하니 다들 걱정 반, 놀림 반으로 전날 밤에 있던 일을 말해줬다. 내가 떡볶이 아줌마 김부선처럼 그에게 치댔다는 것이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긴 한데...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그와 동창이라던 선배가 한 마디 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걔가 너 괜찮대. 걔 진짜 착한 애야. 잘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 남자랑 내가 잘하고 말고 할 게 있었나? 나는 천천히 어제 그와 무슨 일이 있었나 곱씹어 봤다.
그 선배를 따라다니며 내가 도대체 뭘 했냐 물어봤다. 선배는 ‘지금 나한테 이렇게 계속 똑같은 말 하고 또 하는 거! 딱 이랬어.’라고 말했다. 역시 내가 또 그랬구나.
3
술에 취해 흥미로운 남자가 보이면 하는 술버릇이 있다. 그가 눈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워하면서 너무 티 나게 시선을 피하길래, 그 술버릇이 발동된 것 같다.
술에 취했겠다, 갑자기 내 안에서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많아지고, 계속 사적인 선을 침범하고 싶어진다.
‘어디 살아요? 혼자요? 본가는 어딘데요? 아~ 그래서 사투리 쓰는구나. 경상도죠? 창원? 아 제가 이상하게 항상 창원 남자가 잘 꼬이더라고요. 저는 부산 남자 좋아하는데 대구 남자랑은 만나본 적 없어요. 그런 게 확실히 있나 봐요. 근데 전 부산 말고 안 가봤어요. 전공은 뭐예요? 이 일은 어쩌다 하게 됐어요? MBTI는 뭐예요? I시죠? I는 확실하고... 그럼 ISTJ? 저 ST랑 진짜 안 맞는데! 헐. 진짜 ST예요? 빨리 아니라고 말해요.’
흥미가 생긴 남자에게 혼자 우다다 쏘아붙이듯 호구조사를 하고 나면 열 명 중 여섯 명 정도만 남는다.
도망간 네 명은 보통 대답을 끝까지 제대로 하지 않고 웃기만 하던 사람들이다.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럽고 말할 것이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야 그들도 사회생활을 하느라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는 잘 안 그런다.
안 그러려고 한다.
.
.
.
가끔 술 마시면 그런다.
4
호구조사를 하고도 남은 여섯 명 중 네다섯 명은 보통 MBTI가 ENFP 혹은 ENTP였고, 친한 지인으로 지낸다. 그러고도 남은 그 나머지 한두 명은 정말 특이 취향인 경우다. 그 특이 취향의 남자들, 그러니까 내가 먼저 꼬셔서 넘어온 남자들.
그들도 또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웃기는 여자네?’라며 흥미를 갖는 도파민 유형.
혹은
‘이런 여자는 처음이야...’라며 수줍게 마음을 여는 순정파 유형.
나는 대개 도파민 유형과 연애하면 내가 상처를 받는 연애로 끝났고, 순정파 유형과 연애하면 내가 상처를 주는 연애로 끝났다.
그리고 이 남자는 미안하게도 순정파 유형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