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남자(2) 순정파, 30세
::제이레빗 - 요즘 너 말야::
5
일에 겨우 집중하고 있을 때 그에게 카톡이 왔다.
[속 괜찮아요?]
[어제 너무 취하셔서ㅠ 걱정됐어용 ㅜ]
카톡 메시지 끝에 ‘용’을 붙이는 남자라니. 전날 술자리에서 수줍어하는 듯한 모습 몇 번 보인 것으로
그의 반전 매력은 이미 끝났다. 여기에서 더 하면 좀 별론데...
하지만 일단 그와 나 사이에 끼어있는 선배도 있고, 회사 사람들한테도 다 알려진 마당에 카톡 답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답장했다.
다음 날 그가 우리 사무실을 찾아와서 초콜릿을 주길래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다음 날에는 선배를 통해 젤리를 주길래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종종 카톡으로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보내길래 어쩔 수 없이 고맙다고 말은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그와 썸을 타고 있었다.
6
나는 그와 관계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데이트를 하는 건 부담스럽고,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잠깐 얼굴을 보자고 했다.
퇴근하고 카페에서 기다리는데 그가 야근이라며 잠깐 짬을 내서 들렀다. 그럼 그냥 다음에 봐도 됐는데... 역시 부담스럽다.
정말이지 그는 너무 부담스럽다.
이번에는 내가 커피를 사야겠다 싶어서 메뉴를 고르라고 말했다.
“아침에 커피 마셨어요. 어차피 금방 올라갈 건데요. 다음에 사주세요.”
그냥 아무거나 먹어야 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저게 정말 호의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도 착한 사람이니까...
그는 술자리에서 봤을 때처럼 꼿꼿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기가 무슨 군대인가? 커피도 마시지 않으니 더 부담스럽다. 나는 그 정적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무 말이라도 했다. 아무 말이나 한 건데, 그는 내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챗GPT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농담으로 던진 말에도 그는 너무 진지했다.
아직 일을 한참 하던 중이었던 건지 그의 휴대폰은 계속 진동이 울렸다. 빨리 올라가 보라고 말해도 그는 괜찮다며 안절부절 못했다. 결국 나는 쉬는 날에 다시 제대로 보자며 그를 다시 돌려보냈다.
7
우리는 며칠 뒤 회사가 아닌 곳에서 따로 만났다. 어쩌다 보니 그와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었다. 더 최악인 건, 하필이면 그날은 벚꽃이 활짝 핀 날이었다.
대충 회사 근처에서 만나자고 한 건데 여의도공원에는 벚꽃을 보러 온 커플들로 득실득실 꽉 찼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그렇지 코로나고 뭐고, 다들 마스크 끼고도 사진을 잘만 찍고 있다.
저 멀리 그가 무스를 잔뜩 바른 머리에 가죽재킷에 걸치고 걸어왔다. 회사에서 늘 보던 모습과 확실히 달랐다. 누가 봐도 오늘 첫 데이트를 하러 나온 사람처럼 비장했다.
나는 그와 산책길을 나란히 걸었다. 이제 누군가와 벚꽃 데이트를 하는 것도 몇 년째인지. 이제는 별로 감흥도 없는 걸 넘어서 좀 지겹다. 사진을 찍어준다는 말에 괜찮다며 극구 말렸다.
낮술이나 하고 싶은데 그는 술을 안 마시니까 나는 그에게 카페나 가자고 했다.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가서 좀 앉아있고 싶은 건데, 대충 여기 갈까 싶어서 보면 만석이었다. 이디야 커피라도 들어가자 말했더니 그가 그래도 예쁜 카페를 가자며 주변 카페를 한참 검색했다.
결국 우리는 그가 찾은 카페까지 20분이나 걸었다. 봄이라고 해도 꽤 추웠는데 땀이 났다. 그 카페가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서 더 짜증 났다.
8
드디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서 앉았다. 목이 말랐던 건지 그래도 커피라도 마시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시간을 때우듯 아무 말이나 했다.
나는 커피를 원샷을 하듯이 쪽쪽 들이키며 다 마시자 그가 웃으며 나에게 자신의 커피까지 다 마시라며 건넸다.
그는 커피에 입을 대지도 않았다. 아침에 운동할 때만 부스터처럼 한 잔 마시는 게 루틴이기 때문이란다. 그럼 커피 말고 다른 거 시키지...
이런 생각도 잠시, 왠지 내가 커피를 다 마셔야 집에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우물쭈물 대다간 그가 왠지 고백을 할 것만 같았다.
그의 커피까지 얼른 마셔야겠다 싶어서 잔을 딱 든 순간, 그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