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후 나의 세계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오늘도 그러한 변화 중 하나이고, 특별히 글로 남기고 싶어 적는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 맞는 말일까?
그럴싸한 문학적 표현이리라 여겨왔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나는 방안 어두운 공간 속 아기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며 곯아떨어진 시환이를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득 시환이를 보고 있는데 시환이가 보고 싶었다. 이미 보고 있는 대상을 보고 싶다니. 무슨 일인가 싶지만 이 상황을 표현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신기하면서 약간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아마도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음에서 오는 답답함이었음이라.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복을 분석의 칼날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행복한 순간의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답답하다니. 양날의 검을 지닌 좌뇌의 재잘거림에 못 이겨, 결국 나는 답답함을 해석하기 위해 불빛을 찾아 거실로 나왔다. 생각을 정리했다.
이 감정을 느꼈던 그 순간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나의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보고 있는 시환이는 현재의 실체이다. 시환이 존재 그 자체이다.
내가 보고 싶은 시환이는 과거에 대한 기억의 현존이다.
내가 보고 싶은 시환이는 내 기억 속 저장된 과거의 시환이라는 뜻이다.
시환이의 실체를 바라보던 현재의 초점이 과거의 기억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기억 속 시환이에 대한 보고 싶음을 느꼈다.
과거의 기억에 집중한다는 것이 곧 내가 과거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초점이 과거의 기억으로 옮겨진 것일 뿐,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순간에 놓여 나에게 인식된다.
즉, 둘 다 현재에 존재한다. 현재의 흐름 속에서 인식의 대상이 실체에서 기억으로 옮겨간 것일 뿐이다.
두 대상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 둘을 분리하여 해석하니 마침내 마음이 밝아졌다.
그래서 나는 보고 있는 시환이를 보고 싶어 할 수 있다. 현재라는 동시에.
그리고 나는 보고 싶은 시환이를 보고 있을 수 있다. 현재라는 흐름속에.
또한 나는 지금 시환이를 보고 있다. 행복이 가득한 현재에.
- 2024.04.17 어두움이 아늑함으로 변한 방 안에서 시환이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은 아빠 김웅록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