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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an 30. 2023

나의 밑바닥을 끊임 없이 갱신하는 일,

육아.


첫 아이는 그렇게 태어나서 찔끔찔끔 자랐다. 무럭 무럭이란 단어를 절대 쓸 수가 없다. 분유도 어찌나 새처럼 조금씩 쪼아대는지 입맛에 안 맞아 그러나 싶어서 이 분유 저 분유 다 먹여본 것 같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 사탕을 줘도, 초콜릿을 줘도 안 먹을 때에, 이 아이는 그냥 태생적으로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안 다음 그 분유를 바꾸던 간절함이 세상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뭘 줘도 안 먹는 아이. 우리 큰 아이였다.


먹는 것이 적어 체구는 작았으나 아이는 날렵했다. 체중을 제외한 모든 신체 발달이 다 빨랐다. 뒤집기도 빨랐고, 앉기, 배밀이, 기기, 서기, 짚고 게걸음 걷기, 직립보행 모두가 다 빨랐다. 그것은 곧 내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기를 쫓아다닐 일도 그만큼 빨리 온 것, 저지레 뒷감당을 할 일도 더 많아진 것을 의미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삼 개월 까지는 행복 호르몬이 뿜뿜 나왔는지 체력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행복한 날들이었는데  그아기가 누워만 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두 시간마다 깨던 아기가 대여섯 시간씩 통 잠을 자기 시작한다는 백일의 기적, 그 일만 일어나면 육아가 쉬워질 것처럼 기적, 기적, 거리더니 기적은 개뿔, 또 다른 기절의 시작이었다. 잠시 한 눈을 팔면 무언가를 입에 넣고 빨고 있었고 현관으로 기어 나가거나 온갖 곳을 헤집고 있으니 작고 여린 아기가 다치기라도 할까, 이상한 걸 삼키기라도 할까 내 레이다망은 꺼질 줄을 모르고 풀가동을 하고 있었다. 아기만 바라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때에 맞추어 아기의 먹을 것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씻기고 치웠다. 내가 게을러서 소홀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바쁘게 뭔가를 하는데 그러는데! 이 사부작거리는  아기에게 꼭 크고 작은 말썽이 나기 일쑤였으니, 이래서 애 보느니 밭일한다는 옛 말이 있는 거구나, 절실히 느꼈다.


  밥, 잠, 똥, 토, 쉬. 아마 모든 아기 엄마들의 생활이 그럴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한 글자들에서 참고로 내 것은 하나도 해당되지 않았다. 첫 아이를 돌보며 보낸 1년의 시간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힘들었다.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인 초보 엄마, 나 하나 살기도 버거운데 다른 이를 책임져야했고 그 다른이는 아기였다. 너무나 소중한, 사랑스러운, 결정적으로 내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태어나서도 한결같이 저체중이었고, 입도 짧았다. 분유도 이유식도 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이유식은 정말 그랬다. 만들어 먹여도, 사 먹여도 마찬가지였다. 소금 간을 살짝 해 보아도 마찬가지였고, 참기름을 둘러 줘 봐도 안 먹었다. 내 주위를 둘러보아도 안 먹는 아기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안 먹는 아기는 없었고, 작고 말랐다는 아기들도 우리 아기보다는 다 컸다. 살면서 해 보려고 의지를 가지고 덤빈것 중에 못 해내거나 결국실패한 적이 없었다.그 말은 내가 뭐든 잘하는 똘똘이었다는 뜻이 아니고 잘할 만한 것만을 골라서 열심히 하니 성과와 결과는 어느 정도 장담을 했었던 것인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는데도 아웃풋이 안 나오는 일=애 키우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딱히 뭘 잘 못하는 건 없는데, 뭔지 모르게 되게 못 하는 느낌, 굉장히 거지 같았다. 내가 부족해서 아기가 안 먹고 작은 것 같은 그 열등의식 비스름한 것을 견뎌내는 일. 남이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니지만, 또 지나고 보니 내가 봐도 아무 일도 아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늪과도 같았다. 계속 내가 도대체 뭘 잘 못 하나를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예민해서 더 그랬을까?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정 문화가 그렇게 싫었던 것도 그때였다. 아기를 안고 지나가면 온갖 할주머니들께서 쳐다보시고 관심 및 걱정(이라쓰고 오지랖이라 읽는다) 을 해 주셨다. 애가 몇 개월인가, 우리 손주보다 몇 개월 형아인데 근데 이렇게 작은가 아, 엄마가 작구나. 엄마가 애 가져서 밥을 안 먹었나. 엄마가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토종닭을 고아서 그 물에 밥이랑 이유식을 해 먹여라, 소고기 양지를 푹 고아서 그 물에 이유식과 밥을 해 먹여라, 대충 먹이면 안 큰다.  놀랍게도 다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들은 말들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계속 듣다 보면 정말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아기가 작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게 바로 가스라이팅? 그런데 우리네 정서에서는 어떻게 보면 조금 무례할 수 있는 참견을 정이라는 이름으로 정겹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거봐 엄마가 이러니 아기가 저러지로 결론이 날 것만 같아 나는 화도 못 냈다. 이런 부분은 아마 남자아이의 성기를 잡으며 꼬추 따 먹자, 하는 것이 아무리 예뻐도 하면 안 되는 성희롱이라는 것, 아이스케키나 똥집도 장난이 아닌 성희롱이라는 것으로 상당 부분 정착된 것처럼 시간이 더 흐르면 자연스럽게 하면 안 되는 일로 계몽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아! 애기 양말도 안 신겼네 포함, 그 말이 너무 듣기가 싫어서 땀 많은 둘째가 아기 때에 외출할 때마다 한여름에도 그냥 양말을 신겼던 기억이 있다. 난 절대 다른 아기들의 양말에 관심을 갖지 않는 할머니가 되리라 천만번도 넘게 다짐하면서. 여하튼 그 시절의 나는 집 안팎으로 무척 힘들었다. 집에서 애 보는 것, 밖에서 참견을 받는 것.


그럼 그 분노에 찬 에너지가 어디로 분출이 될까. 가엾게도 우리 신랑이었다. 소위 말하는 욕받이 신랑. 한껏 예민해진 성질을 신랑에게 부리기 일쑤였고 신랑의 퇴근 예정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시간의 무게가 천근만근 느껴졌으며 어쩌다 회식이라도, 저녁 약속이라도 있는 날엔 폭발 전야의 화산처럼 부글부글 김을 내뿜으며 스탠바이, 레디, 레디, 레디, 준비, 준비, 준비, 하다가 툭 하고 건드리는 아무것도 아닌 말에 마구마구 빵! 하고 폭발해 버리기 일쑤. 지금 생각하면 산후 우울증이었는데 병원에 가서 마음을 좀 진정시키는 약을 받을 수도 있었던 걸  생으로 버텨버렸다. 그래도 착하고 무던한 신랑은 본인을 홍어처럼 삭히며 나의 화를 받아주었다. 그는 화가 없는 사람. 무던한 것이 장점이고 단점인 사람이다. 그렇게 그 일 년, 내 인생의 가장 치열하고 힘들었던 한해를 그때로 기억한다. 아마 당분간 이 생각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지난 1년.

나도 몰랐던 (주로 안 좋은 쪽으로)

나의 모습과 마주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라 힘들었던 시간.

이를테면

엄청난 몰골, 극단의 짜증,

또라이와 같은 감정의 기복,

슬프기 짝이 없는 무능과 무지..

하지만, 또

못 할 것 같던 일이 가능해진 마법의 시간.

예를들어

아기띠로 아기 안고, 숄더백 크로스로 두르고

양손엔 짐을 들고 계단오르기.

밤 잠 설치기.

똥기저귀 갈아주기.

싱크대에 서서

찌그레기 밥과 반찬으로 끼니 때우기.

할큄과 물림과 쥐어뜯김을 감내하기. 등등의

생전 받아보지 못한 푸대접이

일상이 된 불쌍한 시간.

아이의 첫 생일.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이러하다.

아이와 아이아빠에게

나도 몰랐던 밑바닥의 나를

수시로 보여주어도 괜찮은

진정한 가족이 된 시간.


 첫 아이의 첫 생일날 쓴 나의 일기는 이러하다. 그 후로도 둘째도 태어나고 코로나에 여차 저차 하여 몇 년 간 나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에 만족하며 살았다. 아이는 자랐고, 나도 모든 변화에 더 익숙해졌고, 나의 밑바닥을 매번 갱신하면서도 그것 역시 내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의 고됨, 스트레스를 일상으로, 친구로 받아들이며 나는 살만해 짐을 느낌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살이 점점 빠졌다. 우리 큰언니의 말에 따르면 애를 키우다 보면 살이 찌는 사람, 빠지는 사람이 있는데, 밥을 대충 먹게 되니 처음부터 다시 먹으면 살이 찌는 것이고 너처럼 그 대충 먹은 걸로 말아버리면 살이 빠지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위가 작아 소식을 해야 해서 밥을 하며 간 보고, 대충 주워 먹는 걸로 끼니를 때워버리는 나는 철저히 후자의 경우였나보다. 그렇게 아이는 피었고, 나는 쇠했다.    


옛날 엄마들의 가사노동에 비하면 소꿉놀이 수준이었겠지만,나는 <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라는 책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노예, 사유 할 능력이 안 되고 사유해볼 시간도 없는 그냥 도구였다. 그게 힘들었던건 감사하게도, 좋은 세상, 좋은 시절에 좋은 부모님을 만나 자라서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았다. 하나는 자산, 다른 하나는 도구. 그는 노예를 집 안에서 인간들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들을 가능케 하는 살아있는 도구로 보았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은 많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비된다. 예를 들어 당시에는 지금처럼 옷감이 대량 생산되지 않았으니 천을 짜고 옷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는 엄청난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만 하고 앉아있으면 그리스가 사랑하는 민주주의를 하러, 즉 다른 시민들을 만나 공동체에 대한 토론을 하러 아고라에 나갈 시간이 없다. 노예들이 있기에 시민들은 자유를 가지고 공적 토론의 장에 나가 의미 있는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이 잘 살도록 내 시간을 쏟아붓고 있는, 우리 집안의 생존에 필요한 도구, 그게 나였다.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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