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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an 31. 2023

아기는 키워봤지만,둘째는 처음이라.

아롱이와 다롱이.

그렇게 둘째도 산후조리원에 가지 않고 병원에서 2박 입원 후 집으로 왔다. 남편이 나보다 어리고 예쁜 둘째 부인을 데려와 이제부터 같이 살아야 하니 친하게 지내란 말을 들은 조강지처의 마음이 바로 동생을 본 첫째의 마음이라 하니, 선물부터 안겼다. 이거 슬기가 (슬기= 둘째의 태명) 하늘나라에서 형아 주려고 사 온 선물이야. 그 선물은 듀플로 레고블록인데 참고로 지금까지도 리필에 리필을 거듭하며 잘 가지고 논다.


한 번 아기를 키워봤다고 둘째는 확실히 수월했다. 아니 나는 그랬다. 그래서 수월할 줄 알았다. 둘째를 낳고는 회복이 초스피드로 된 나라는 산모는 출산 다음날 병원에 놀러 온 첫째와 마룻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놀이를 했고 (헉! 내가 쪼그려 앉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한참 놀이에 집중하다 자세를 바꿔 앉았다) 병원을 씩씩하게 걸어 다니며 간호사 선생님들의 엄지 척을 받기도 했다. 집에 와서도 아기 목욕도 시켜주고, 많이 안아 주고, 들러붙는 첫째도 들썩들썩 안아주었다. 집에 온 후 사나흘 만에 운전을 해서 친정집(차로 15분 거리)에 다녀와 아빠에게 나 무사하다는 보고를 하였고 어린이집 하원 후에 영 시무룩해하는 첫째와 버스를 타고 이마트에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초겨울이었는데 온몸을 발목까지 오는 롱패딩으로 꽁꽁 둘렀다.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문제는 또 유선염이었다. 열이 40도까지 올라 일주일 동안 헤롱거렸고 약 먹느라 밥은 티스푼으로 겨우 먹으니 그 참에 또 젖을 끊고 분유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모유는 턱도 없을 터.


한 번 아기를 키워보았지만 둘째는 둘째였다. 분유를 새처럼 쪼아 먹던 첫째만 생각했는데 둘째는 분유를 꿀꺽꿀꺽 먹으며 등을 두드리려 트림을 시켜주면 크억 하는 트림을 토해내고는 바로 잠이 들었다. 분유 수유에도 최소량과 최대량이라는 권장량이 있다. 500밀리 이상은 먹어야 하고 최대 1000 밀리를 먹으면 안 된다. 최소량은 성장에 필요한 최소량일 거고 최대량은 아기의 신진대사의 무리가 가지 않는 선이라고 들었다. 그게 1000밀리, 작은 아기의 몸과 어른의 몸을 비례식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우유를 5000밀리, 7000밀리, 10000밀리를 먹는 것과 같은 셈이었으니 (칼로리, 영양분 흡수율을 제외하면) 우유를 많이 먹고 잠을 그렇게 자면 어른도 살이 무럭무럭 살이 찌겠구나 싶은 양이었다. 둘째는 언제나 배고파서 울었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첫째처럼 둥가둥가 만 해 주었다. 응애응애 울다가 턱받이를 해 주면, 아 이제 밥 주겠구나 하고 최선을 다해 울음을 그치고 분유를 먹었다. 이가 나고 쪽쪽이를 물고 지근거리던 시기에 아빠가 질근거리는 마른 오징어를 보고는 쪽쪽이를 뱉어버리고 빛의속도로 기어와 오징어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마른 오징어를 물고 빨아 거의 원 상태까지 불려놓고는 엄마에게 뺏겼다. 아기가 오징어를 삼키게 두기엔 좀 겁이났다. 목에 걸릴까봐. 그때 알았다. 너는 먹보로구나. 분유를 거의 최대량을 채워 먹었다. 어느 날은 최대량이라는 1000밀리를 넘게 먹는 날도 있었다.  신장과 신진대사에 에 이상이 생긴것 같진 않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백일 즈음에, 형아가 돌 때 입었던 옷을 입었으니 말 다했지 뭐.  


그때쯤 아빠는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역시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는 가끔 갔다. 아빠는 주무실 때도 있었고 아이들을 알아보고 기뻐하실 때도 있었지만 인사를 나누고 나면 항상 얼른 가라고, 빨리 가라고 하셨다. 원래 그런 스타일이신지, 본인의 아픈 모습을, 요양병원의 그 분위기를 오래 보여주기 싫으셨는진 모르겠다. 아빠는 말라가고 둘째는 포동포동 살이 올라 아빠 옆에 놓으면 면구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통통한 아기와 바짝 마른 외할아버지라니. 아빠는 네 번째 외손자를 눈으로만 바라보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는 가끔 아빠가 우리 집에 퇴근하듯 들어와 둘째 랑만 놀아주고 다시 출근하듯 나가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그 꿈을 꾼 날은 정말 밤새 아빠가 우리 집에 들러 간 것만 같았다. 산타 할아버지처럼.


 그 아기가 자라며 뒤집고 기고 잡고 일어나고 직립보행을 하는 일 년도 멘붕에 멘붕을 거듭하는 한 해였다. 아기의 분유, 이유식, 네 살 아기의 유아식, 어른 밥. 우리 집의 밥 종류는 세 가지였고 모두 다 만들지는 못해서 가끔 사 먹거나 얻어먹긴 하였지만 어쨌거나 먹이고 치우는 건 거의가 내 몫이었으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내 손엔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있으니 집이 깔끔해야 하는데 네 살짜리가 있으니 집은 깔끔할 수가 없었고 오만 것이 위험한 것 투성이어서 둘째는 더 아찔했다. 색연필을 빨고 있었고, 청소용 스펀지 매직블록을 갖고 놀며 먹으려다가 다행히 나한테 걸리기도 했다. 두 형제가 빨래 건조대와 함께 놀다가 와장창 무너뜨리는 사고를 치기도 했으니, 물티슈를 갖다가 다 뽑아 놓은 건 애교였다. 그래도 둘째라고 나는 조금 유해졌다. 매트를 깔고 마루에 튀밥을 뿌려주어 나 커피 마실 시간을 벌기도 하였고, 온 마루에 전지를 깔아 놓고 색연필과 스탬프 물감을 주고 역시 나 커피 마실 시간을 벌기도 하였다. 커피 마실 시간 치고는 비싼 뒤처리 노동을 해야 했지만, 둘이 같이 놀았으니 그렇게 억울하고 아깝진 않았다.     



2019년 늦가을. 둘째의 첫 돌. 

요즘 나무들을 보면 나무마다 잎마다 색이 다 다르다.

햇볕과 바람과 빗물은 공평했을 텐데

저마다 조금씩 속도가 다른가보다.

어떤 것은 일찍 무르익고

어떤 것은 아직 파랗고.

사람들도, 아이들도

이 나무들과 같겠지.

그 저마다의 속도엔 옳고 그름이 없음을.

모두가 어우러져 이렇게 더 아름다운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겠다.

잠이 안 와 둘러본 지 난 1년의 시간들.

내가 이렇게 화를 잘 내고

작은 것에 집요할 정도로 예민하고

어이없을 만큼 멍청하고 무능하지만

의외로 엄청난 체력이 있어

이렇게 잠을 못 자도 잘 참는 사람인 줄

예전에 알았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육아는 언제나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달갑지가 않은 모습들이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게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것만큼 힘들다.

82년생 김지영들이 힘든 이유도

아니, 그 또래의 모든 이들이 지금 힘든 이유도 그러하리라.

이런 밑바닥의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이젠 바뀐 삶을 인정 해야 하는 것.

현실과 사회는 바뀌지 않았고 바뀌지 않고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

이번에 개봉한다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는 못 봤는데

손목 보호대를 한 채로 애를 안고 주방정리를 하는 스틸컷이

마음을 때린다.


둘째의 첫 돌 즈음 쓴 나의 메모. 


아이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계속 혼자 주인공으로만 사는 부모도 슬프지만, 나를 완전히 버리고 세상에 아이만 존재하는 것처럼 사는 부모도 슬프다. 내가 밥을 못 먹더라도 아이 입에 따뜻한 밥을 넣어주고, 나는 몇 년째 옷을 못 사도 아이에게는 철마다 알록달록 고운 옷을 입히는 게 '엄마의 마음"이지만 이런게 '엄마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육아용품중에는 플레이펜이라는 것이 있다 아기를 가둬두는 울타리다. 하지만 이게 편하다고 해서, 혹은 안전하다고 해서 아이를 종일 이 안에만 넣어두면 아이는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놀이터 역시 그렇다. 적당한 선에서 아슬아슬함도 느껴보고 위험한 경험도 하고 조금은 다쳐보기도 해야, 아이들은 자기몸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몸으로 배우게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좀 위험해 보이면 "ㅇ러쟈ㅔ버ㅏㅣㅇ롬ㅂ덜이ㅏ 안 돼!!!!!!" 보다는 "조심해"하며 웃어주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게 된다. 중용이란게 평생 그렇게 어려운 숙제다.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그렇게 또 다른 나의 밑바닥을 갱신하던 둘째의 첫 1년이 지났다. 다행히 둘째는 잘 먹고 잘 자는 아기였다. 그건 나를 일정 부분 편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첫째가 안 먹어 마른 것이 내 탓이라는 누명을 벗겨 주기도 했다. 혹자는 엄마가 그동안 많이 유해지고 내려놓아서 아기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 더 순하게 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역시 일리가 있다. 엄마의 감정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될 테니, 먹어라 먹어라 전전긍긍하더 나의 모습에 질려버려 첫째는 더 입맛을 잃었을 수도 있고,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도가 튼 눈빛을 하고 이유식 숟가락을 내미는 엄마를 보며 둘째는 더 잘 먹었을 수도 있다. 처음엔 소 닭 보듯 서로를 싫어하고 경계하던 형제도 같이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의 시간은 지루하고 더디게 흘렀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그래도 즐겁게 흐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친해지고 즐거워지니, 나는 깡패가 되어갔다. 다정함과 즐거움에도 총량이 있는 모양인지, 아이들이 다정해질 수록 나는 소리지를 일, 화를 불같이 낼 일이 많아졌는데 그런 나를 보며 친정 부모님은 우리 막내딸이 아들 둘 키우며 깡패가 되었다고 속상해 하셨다. 아니, 내가 그렇게 고왔나? 그런 적이 있었나? 생전 큰 소리를 안 질렀다고? 내가? 화를 안 내고 밝고 명랑했다고? 누가? 내가?

  

 둘째는 11월 생이라 우리식 나이 셈법으로 돌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세 살이 되었다. 개월수에 상관없이 세 살이면 어린이집에 보내기에 딱 적당한 나이, 아 기다리고다리던 그 세 살. 그렇게 2020년이 밝았다. 난 2020이라는 숫자를 보며 꼭 스무 살 스무살 하는 것 같다고 설레어했다. 스무살때 누린 자유와 행복처럼, 아이 둘을 다 기관에 보내고 단 몇 시간만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을 거라고 행복해했다. 그 스무 살 스무 살 같았던 2020년에 무슨 일이 터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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