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18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둘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35세 이후에는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고, 그때쯤 이 35세 이전 출산의 마지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첫째 때도 그러했듯 둘째에 대해서도 크게 욕심, 관심, 계획 같은 것들을 두지 않았다. 체력적, 경제적, 정서적으로 막연한 두려움만 있었다.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둘을 어떻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확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로 그냥 회피하듯 미뤄 왔었는데, 첫 아이가 18개월쯤, 즉 내가 정한 출산 가능한 나이의 마지노선이 다가올 때쯤, 아기용품들을 정리하냐 마냐의 문제도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타지 않는 유모차와 범보 의자, 모빌, 울타리? 그거 뭐라고 하더라? 이젠 이름도 생각 안 나네 그렇게 부피만 차지하는 아기 용품들을 둘째 계획이 없다면 정리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기증을 하든 당근에 팔든. 딱 그때, 둘째가 생각지도 못하게 우리에게 왔다. 예상치 못한 임신에 지 유모차 팔아 버릴까 봐 서둘러 왔나 보라고 그렇게 생각할 할 정도로.
둘째의 임신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역시나 입덧이었다. 첫째는 임신을 확인하고 일주일 후에 시작 한 입덧이 둘째는 임신 5주도 되기 전에 시작되어 토악질을 시작했다. 세 살 된 큰아이의 먹을 것을 수시로 챙겨줘야 하는데, 나는 음식 꼴도 못 보겠는 사람이 되었고, 기운이 없고 어지러워 절반은 누워 지내야 해서 그때 큰아이는 뽀로로 전편을 마스터하였다. 첫째보다 심했다. 몸무게도 좀 더 빠졌는데 41킬로 밖에 나가지 않는 나를 보며 간호사가 우리 신랑보다 더 울상을 지었다. 첫 아이는 엄마 뱃속에 동생이 있다는 게 뭔 말인지도 모른 채로 지내다가 어린이집 자리가 나서 등원을 시작하였다. 23개월에 첫 기관생활을 시작하였으니 엄마랑 오래도 함께 붙어있었던 셈이다. 시간이 지나 입덧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도 둘째의 임신엔 힘든 점이 많았다.
아빠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 아빠는 둘째를 가지기 몇 달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신 상태였는데 그 좋았던 상태가 다시 점점 안 좋아지신 것이다. 아픈 아빠 옆에 앉으면 슬펐다. 슬퍼하는 게 아빠에게도, 아기에게도 미안했다. 집에 와서 눈앞에 하나, 뱃속에 하나 있는 아이들과 함께 웃다가도, 아빠의 아픈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기쁘다가 슬프다가 오락가락이었다. 내가 슬퍼하니 아픈 아빠도 미안했고 그래서 나는 또 미안했다. 뱃속의 아이가 힘찬 태동으로 존재를 알리는데 새끼 품은 어미가 이렇게 슬픔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아이에게 또 미안했다. 그때그때 감정을 하나씩만 정했다면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게도 모든 순간에 두 가지 감정에 휘말려 충분히 행복을 느끼지도, 슬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내가 감정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아빠와 뱃속의 아기,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나 때문에 함께 애매한 감정에 매몰되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아빠가 안 좋아졌다. 예정일 보름 전, 큰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견학을 가던 날, 그날따라 촉박해진 등원시간에 쫓겨 아이를 번쩍 들어 안고 어린이집에 뛰어갔다 왔더니 피가 조금 비쳤다. 만삭 임산부의 출산 징후였다. 담담히 생각하였다. 첫째가 2박 3일 만에 나왔으니, 둘째가 빨리 나와도 1박 2일 만에 나온다 치면 내일 오후쯤 나오겠군. 1박2일. 오판이었다. 아기는 그날 저녁 6시에 나왔다. 친정에 연락을 하니 언니가 아빠가 안 좋은데 잠깐 아빠 보고 가라고 데리러 오겠다 했다. 당연히 갔다. 당분간 못 볼 텐데. 당시 아빠는 집에서 엄마와 언니의 돌봄을 받고 계셨는데 갈수록 거동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정신도 가끔 오락가락하셨다. 우리 가족은 아빠와 어쩌면 이별을 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니 차를 타고 친정에 가서 아빠의 얼굴을 봤다. 아빠, 나 누구게? 하니 아빠가 하신 말씀. 내가 너를 못 알아보면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지, 제원이. 응, 맞아. 나 오늘내일 애기 나올 것 같아. 보름이나 일찍. 응, 순산해라. 아빠는 손이 움직이지 않아 나를 쓰다듬지 못했다. 내가 아빠 손을 한 번 잡고 방을 나왔다.
그렇게 언니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배뭉침이 느껴지는 것이 정말 둘째는 이렇게 빨리 나올 건가 보다 싶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용실에 가서 긴 머리카락을 뎅강 잘라 버린 일. 어차피 빠질 머리,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긴 머리는 사치일 뿐이란 걸 경험으로 알았기에 난 약한 진통을 견디며 머리를 잘랐고 역시 조산사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산부인과 진료와 조산원 진료를 병행하고 있었고 당연히 둘째도 출산은 조산원에서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막달에 들어서며 아기 몸무게가 2킬로가 넘었고, 마지막 37주 진료에서 2.2킬로가 되었으니 산부인과에서도 나를 대학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미 저체중 아기를 낳은 경험이 있는 경산부이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 듯했다.
조산사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이 정도 배뭉침이라면 언제쯤 조산원에 도착하면 될까를 여쭤보려 했는데, 아뿔싸, 조산사 선생님께서는 나의 출산 예정이 보름이나 남은 상태라 제주도 여행 중이셨던 것이다. 이삼일 후에 올라오신다는데 둘째 아기가 기다려 줄리 만무했다. 급하게 다른 조산사 선생님의 번호를 받긴 했지만, 둘째의 진통 주기는 갑자기 빨라져 5분 간격이 되었고 당장 아기를 낳으러 가야 하는 상황에 모르는 조산사 선생님께 갈 순 없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연락을 드려 첫째 하원을 시켜 다니던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내가 갑자기 아기를 낳게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랑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엄마는 아픈 아빠를 혼자 두고 나를 보러 올 수 없으니 차키 대신 묵주를 들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분만 준비가 시작되었고, 바로 무통주사가 들어갔으며 신랑이 도착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나는 우리 첫째 아이가 오후 간식도 못 먹고 어린이집에서 들려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신랑에게 아이와 밥 좀 먹고 오라고 내보내려 했는데, 둘째 좀 있으면 나온다고 조금 더 대기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리고 정말 조금 있다가 둘째는 몇 번의 힘주기 끝에 씀풍 나왔다. 병원에 도착하고 두 시간 만에, 진진통이 시작된 지 네 시간 만에 무통주사의 은혜로 나는 물론 산고 끝에 아기를 낳았지만, 이런 걸 순산이라고 하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둘째는 초음파로 봤을 때 보다 더 큰, 2.7킬로의 몸무게로 나의 품에 안겼다. 나는 아기를 끌어안고 또 울었다. 엄마가 너 가지고 슬피 운 일이 많아서 미안하다고. 근데 슬퍼서 어쩔 수 없었다고. 아기는 괜찮다는 듯 내 품에 안기자마자 안정을 찾고 우렁차던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그 옆에서 외계인을 만난 듯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첫째를 나중에 사진으로 확인하였다. 그래서 또 웃었다.
그런데 아기를 안으면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갓 태어난 아기의 그 믿을 수 없는 보드라움도 좋았고, 기저귀 분 냄새 같은 것이 덧입혀져 있어서 안고 있으면 정말 좋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서 나는 예쁜 아기 냄새가 코에 폭 와닿으면 마음이 풀어지고 미소가 났다. 아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데 또 아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평생 이런 아이러니가 지속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