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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ug 03. 2023

정답지를 베낀 아이.

사실 뭐, 이 정도는 애교야.

 큰 아이는 매일, 은 아니고 거의 매일 수학 문제집을 푼다. 축구 교실과 미술학원은 다니는데 공부 학원은 다니지 않는 대신 집에서 국영수를 시키고 있다. 국어는 책을 읽어주고, 그림일기를 일주일에 몇 번은 쓰게 한다. 심심하면 집에서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꺼내 읽었던 나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큰 아이의 독서는 종이접기 책이나 체스책과 같은 비문학, 정보전달 위주이다. 성향이 그런 것 같아서 그림책은 두 살 어린 둘째 수준보다 금 높게 잡아 내가 읽어주는 편이다. 읽으라면 안 읽어도 읽어 준다 하면 쪼르르 오는 것을 보니 책 자체를 싫어하진 않는 것 같다. 나름 책 좋아하고, 글 쓰는 취미를 가진 엄마는 아이가 더 재미있는 책을 탐독하고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여 글을 썼으면 좋겠지만 아이의 취향을 존중해 주기로 하였다. 일단, 읽고 쓰는 것에 만족하기로, 더 큰 활동은 나중에 선생님과 자기가 욕심이 나면 하겠지 하고 집에서는 그 정도만 한다. 영어는 내가 영어 강사이니 집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시키고 있다. 생활보다는 학습이지만, 아이의 성향상 스피킹을 욕심 낼 것 같지 않아서 마음 편히 학습으로 시킨다. 아이의 성향은, 낯을 매우 가리고 친한 친구 (세 살 때부터 어린이집 같이 다닌 동네 친구) 아니면 멀리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학급 급우에게도 인사를 못 하고 내 뒤로 숨는다. 너는 왜 인사를 안 하냐고 물으면 속으로 했다고 한다. 그런 아이에게 영어 스피킹은 너무 어렵지 않을까. 혹시 모르겠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불이 붙는 어떤 계기가 생기면 쌸라 쌸라 하고 다닐지.


수학은 사고력 문제집이나 문장제 문제집을 풀리고 있다. 수학 익힘책은 부족함 없이 푸는 아이라 문제집 난도는 약간 어렵게 잡았는데 그걸 잘 따라오고 있다. 너무 잘하는 것 같아서 양을 늘리고 싶었다. 엄마 욕심에. 요즘은 방학이라 숙제를 준다. 사달은 숙제가 두 바닥이다가 네 바닥으로 갑자기 늘어난 날 일어났다. 문제집 검사를 해 주는데 문제집이 너무 깨끗하게 정답만 적혀 있고 답이 맞았다고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이의 문제집에 정답지를 함께 준다. 채점은 문제를 풀자마자 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엄마가 매번 함께 있을 수 없고, 답지 보고 채점 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그랬는데 아이는 네 바닥으로 늘어난 숙제의 양에 정답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일단 엄마가 귀신 같이 알았다는 것에 아이는 경이로운 공포를 느낀다. 제가 얼마나 티가 나는지 모른 채로, 이거 답지 보고 한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술술 분다. 문제집을 보니 몇 군데 깨끗한 부분이 있긴 했다. 몇 번 답을 보고 쓴 모양이다. 웃음이 났다. 아니, 이렇게 티나게 베끼면 어떡하니 아가야, 몇 번 끄적끄적 한 척을 해야 안 걸리지!


(웃음을 참고) 불같이 혼을 내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몇 가지 설문지를 작성하여 아이와 의견을 나누었다. 정답지의 유혹이 가끔 찾아올 것 같다고 답지를 반납하겠다고 한다. 답지를 보면 안 되는 이유는 실력이 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자기는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한다.


왜 잘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조금 묘했다. 그냥 못 하는 것이 싫기도 하고, 엄마한테 칭찬받는 것이 좋다고도 한다. 전자는 괜찮은데 후자가 조금 걸렸다. 내가 잘할 때만 칭찬을 해 주었나, 열심히 하는 과정을 칭찬해 주는 엄마이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결과물에 칭찬이 얹어졌나 보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잘했다고 칭찬한 건 엄마가 잘 못 한 것 같다고, 열심히 했으면 못 해도 칭찬받는 것이 맞으니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하라고 했다.

조금 어설퍼 보여도 하루 종일 접어서 완성한 중급 종이접기.

큰 아이에게서는 끈기와 성취욕이 보인다. 승부욕 하고는 조금 다른, 자기가 만족해야 끝나는 자기와의 싸움이 느껴진다. 나도, 신랑도, 심지어 둘째에게서도 느껴지지 않는 기질이다. 그런 기질은 종이 접을 때, 줄넘기를 할 때 모두 보인다. 아이는 눈에 불을 켜고 노력을 하여 종이 접기도 잘하고, 줄넘기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스스로 만족한다. 그때까지는 뜯어말려도 연습에 몰두한다. 기특하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세상 그렇게 피곤하게 살 것 뭐 있니? 그런 아이의 기질, 그래서 공부를 조금 시키고 있다. 학원을 돌리기에는 아이의 체력도 우리의 경제력도 부족하니 일단 엄마표 문제집 셔틀로 시작을 했다. 아이는 자기가 우리 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고 싶다고 하고, 자기 학교에서도 제일 잘하고 싶다고 하고 대회에 나가서 트로피나 메달을 받고 싶다고도 한다. 그래서 문제집을 풀리는데, 요놈이 정답지를 보고 썼다.


불같이 혼낸 그 밤, 잠자리에 누워 엄마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고백하였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갑자기 양이 많아지고, 다른 놀이가 얼른 하고 싶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정답지를 보고 쓸 거면 당당하게 엄마한테 놀 권리를 요구하라고 하였다. 아니면 양을 줄이는 타협이라도 하라고, 아니면 차라리 숙제를 하지 말고 혼이 나라고. 아이는 알겠다고 한다. 샘 많은 둘째는 엄마랑 형아랑 둘이 하는 것이라면 뭐든 샘을 내는데 형아와 공부 이야기 하는 것에 있어서는 샘을 안 낸다. 기특한 것. 제 복은 제가 타고나는 것이 맞나 보다. 큰 아이는 문제집을 풀며 눈에 불을 켜고, 둘째는 한글 공부 좀 하라 하면 엄마가 예쁘다며 알랑방구를 뀌며 나에게 들러붙는다. 아롱이, 다롱이의 여름방학 학습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말 모르겠다. 너무 되는 대로 하고 있나.

 

공부 잘 하고 싶다는 아이야, 뺑뺑이 돌려줄까, 아니면 그냥 그럭저럭 지내며 그럭저럭 하게 해 줄까. 엄마는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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