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영편지 23

by 순례자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은 이제야 편지를 쓰는구나.
오늘은 예기치 않은 일로 정신이 쏙 빠져서 우와좌왕하다가 간신히 일을 추스르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창밖을 본다. 봄이 쉽게 오지 않는구나. 바람에 휘영청 휘날리는 나무들이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연초록 잎새들을 가지 끝에 매달고 버티고 있구나. 그 모습이 안쓰럽기보다는 장하게 느껴졌다. 이 계절이 지나면 온산이 앞 다투어 신록의 바다가 될 걸 아빠는 알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결과를 아는 사람은 과정에 매몰되지 않게 된다. 얼마 뒤면 온 세상은 온통 푸르고 싱싱한 언덕이 될 테니 이 모진 바람은 곧 지나갈 바람일 뿐이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볼게. 오늘은 고등학교 3월 전국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어. 고등학교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는 수능과 거의 유사한 형식으로 진행되어 수능 대비 학습 전략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특히 고3이 된 학생들은 지난겨울 방학 동안 공부했던 자신의 현재 성적을 확인하고 전국 수험생들과 비교해서 대입 전략을 세우는 첫 시험이야. 자신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학습 계획을 수정하는 데 활용되는 시험이니 학생들이 잔뜩 긴장하고 준비하는 시험이야.


그런데 4교시 탐구영역 시간에 사건이 터졌어. 너는 수시 전형 해외고등학교 졸업 자격으로 대학에 입학했으니 수능을 치르지 않아서 그 복잡한 4교시를 말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탐구영역 4교시는 14시 50분부터 16시 32분까지 진행되고 한국사는 모두 응시해야 해. 그리고 사회, 과학, 직업탐구 영역 총 17과목 중에서 사탐과 과탐을 구분하지 않고 최대 2과목을 선택할 수 있고 각 과목은 20문제로 구성돼 있어. 시험 보는 사람이나 감독하는 사람 모두 이 시간에는 바쁘고 또 긴장하는 시간이야. 매년 수능탐구 영역 4교시 응시 방법 위반으로 40~50명이 시험 무료 처리 되는 것을 보면 추측할 수 있겠지.


사건이 터졌다고 했지? 초임 선생님 한 분이 이 시간에 문이과 수학 문제지를 바꿔 배부했어. 시험이 시작된 지 30분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 시험을 보던 한 학생이 "선생님, 문제가 이상해요!"라고 했단다. 초비상이 걸렸어. 담당자 긴급 소집이 열렸고, 격론 끝에 해당 시험을 다시 보기로 했어. 전국 단위의 시험이기에 교육청에 연락해서 승인을 받은 후에 학교 인쇄실에서 600명 분량 824쪽을 다시 인쇄했어. 한 팀은 콜렉팅 테이프 160개를 사러 나갔어 답안지를 모두 지우기 위해서야. 정규 고사가 모두 끝난 후에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규 고사 시간이 모두 마친 후에 탐구 영역 4교시를 다시 치렀어. 결국 모든 시험은 1시간 30분 뒤인 6시 30분에 끝났고, 감독관이나 학생 모두 초주검이 됐어. 모두 지쳐서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어. 아빠도 기운이 쏙 빠지더구나. 물론, 아빠 실수는 아니지만, 아빠가 담당부서 책임자니, 이 큰 소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잖겠니. 결국 교육청에 답안지를 직접 가져다주고 접수 확인증을 받았다.


학교에 들어와서 뒷정리를 하고 의자에 앉으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땅으로 꺼지는 듯하구나. 아침 6시부터 정신을 쏙 빼놓더니 저녁 9시가 돼서야 퇴근했단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사태를 정리하려고 신속하게 움직여 줘서 빠르게 재시험을 볼 수 있었단다. 어쨌거나, 엎질러진 물이지만, 재시험은 최선의 해결 방법이었다.


지금은 퇴근해서 씻고 자리에 앉았다. 아들의 편지를 엄마로부터 받아 들고 네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아빤 이미 훌쩍 커버린 우리 아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피로를 모두 날려버릴 만큼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니 편지의 말미에는 언제나 의문이 남는다. 우리의 기도대로 훈련소에서도 만남의 복을 하나님이 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 역시 우리 하나님 최고, 최고!! 란다.
훈련소에서 받은 성경을 포켓에 넣고 다니며 읽어서 오래 사용한 사전처럼 두배로 부풀어 올랐다니 기쁘구나. 우리 아들이 말씀과 은혜에 푹 빠져 살고 있다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사랑하는 아들아


늘 네 마음속에 꿈을 키우면서 네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커가는 모습을 상상해야 한다. 네 자신만이 아니라 너와 함께 가야 할 사회적 약자들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함께 생각하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책임 있는 인재가 돼야 한다. 우리 아들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자리로 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렴. 모든 일에 승자가 되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언제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첫째가 복음이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을 잊지 말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선한 영향력을 위해 너 자신을 키워가렴. 그러면 그때 네가 바로 세상 가운데 우뚝 서게 될 거란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 하루도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사랑한다. 축복한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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