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례자 May 13. 2024

08   한국과 중국, 그 어디쯤

08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이른 아침의  공항버스는 텅 빈  도로를 빨랫줄처럼 뻗어 나갔다.  버스 안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몸을 뒤틀며 하품을 하거나 더러는 몸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가로 꺾은채 이른 아침의 부족한 잠에 곯아떨어진 대여섯 명의 승객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재잘 대던 아이는 이내 내 품에 안겨 잠들었고, 아내는 창밖을 보며 말이 없었다. 버스가 올림픽 대로에 올라서면서 스멀스멀 몰려들던 짙은 안개로도로는 10여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전 가족 여행 중에 한라산 정상을 넘어설 때 갑자기 쏟아진 폭설과 사방에서 순식 간에 밀려와 차 주변을 온통 하얗게 둘러 짙은 연무 속에 헤맸던, 당혹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귀국 직후였고 운전은 10여 년 만에 처음었다.  11인승 렌터 안에는  두 가족 8명이 타고 있었고, 내가 이차를 운전한 것은 단지 1종 보통 면허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식은땀을 흘리서 생각했다. 이런 내게 운전을 맡긴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비상등을 켜고 앞 차의 점멸등을 놓칠 까봐 온몸의 신경을 곤두 세우고핸들을 움켜쥐고는 머리가 앞 유리창에 닿을 만큼 잔뜩 웅크린 채, 눈 쌓인 고개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차가 제멋대로 빙글 돌아갈 때마다,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이상한 것은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머릿속 나른하고 몽롱 해면서 졸음이 쏟아져, 심하게 도리질 쳐야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구름 속을 헤집고 가는지 도로 위를 지나가고 있는지, 몽환같은 상황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앞 차의 비상등뿐이었다. 앞 차의 깜빡임이 시야에 사라져 버리면 갑자기 길을 잃고 갈 방향을 몰라 공포에 사로잡혔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눈은 쉬지 않고 쏟아져, 와이퍼가  유리에 쌓인 눈을 제대로 밀어내지 못했고,  뿌옇게 시야를 가린 유리창은 에어컨으로도 걷어 내지 못해 연신 손으로 문지르고 운전을 해야 했다. 바로 옆 절벽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을까,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깊은숨을 몰아 쉬었다. 아니 그동안 내가 숨을 쉬고 있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시간과 장소, 하는 일이 명료하게 출력된 계약서를  손에 쥐고서도,  아이가 우리가 가는 곳에 대해 쉴 새 없이 물었지만,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실상은 나 그곳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 옳았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누구나 아는 상식 수준의 단편적인 지식이었다. 남한의  1/9 쯤되는 면적에 1000만 명의 인구가 밀집되어 사는 공산주의 국가의 한 대도시이고, 그곳에 사는 교민과 주재원, 외교관 자녀를 가르치러 간다는 것뿐이다.

   내가 꼭 중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나는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탈출이 필요해서 몇 차례 일탈을 시도했었다. 처음의 시도는 E 여자대학에 작문 강사를 시작한 일이다. 새로운 일을 하면 내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할 즈음에, E 여자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작문 강사 구인 공고를 봤다. 평소 쓰기에 관심이 많던 나는 지원했고 합격했다.

    아마도 일찌감치 쓰기와 논술에 관심을 갖고 준비했고, 그 당시에는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운 좋게 새로운 선택이 쉬웠을 것이다. 나는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언어교육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첫 2년은 재학생을 대상으로 작문과 리포트 쓰기, 논문 작성을 가르쳤고, 나머지 5년은 막 붐이 일기 시작한 한국어를 가르쳤다. 교환 학생으로 온 10여 개국 학생들과 일반인 외국인들이 한 교실에 10여 명씩 앉아 있었다.

   이 일은 수업 준비와 평가 등 잡무가 가르치는 일만큼 많았는데 보수는 적었고 신분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 강사는 내가 유일했고, 대부분의 대학에도 여자 강사들 뿐이었다.  주로 야간 수업만을 담당한 내가 강사실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여자 선생님들은 하루 종일 고된 일과에 지쳐서 좁은 책상에 엎드려 잠시 단잠을 취하곤 했다.

   학교의 일정을 조율해서 보충 수업과 도서실 감독이 없는 날을 정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하러 갔다. 보통 오후 5시 30분에 시작해서 180분간 수업 이어졌고, 이 일은 제법 유쾌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그들의 열망은 수업 시간 내내 가벼운 긴장과 들뜬 분위기를 유지했고 언제나 재미있었다. 대부분 학생이었고,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 사이에 한두 명의 남학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중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 주 주말까지 수업을 이어 갔다. 굳이 이 일이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떠나오기 전 날 친하게 지내던 L 선생이 물었다.


“ 왜 하필 중국이야?, 얼마나 있다 오는 거야?”



  최종 합격한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나는 저울질을 했다. 어차피 모두 낯 선 곳이었다.  새해 벽두에 TV에서는 온통 중국 관련 특집이 편성됐다. 붉은 바탕에 용이 꿈틀대는 첫 화면에 뒤이어, 향후 20년 이내에 중국이 G2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앞 다투어 떠들어 댔다.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면 베트남 보다는 중국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그때가 2000년 대 초반이니 내 귀에는 중국보다는 중공이 더 귀에 익었던 때다.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돌아 올 기한을 못 박았다. 교장은

      “ 우리 학교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 에요. 내가  재단 무~척 설득했어요. K 선생님이 하도 단호해서 보내 드리는 것이니 2년 뒤에는 반드시 돌아오세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교장은 검은 뿔 테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는 개구리 같은 눈을 끔뻑 거리며   '무척'에 유독 힘을 줘 얘기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세상 일은 나보다 더 크고 높은 존재가 이끌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 되었고, 내가 1년의 중국 활을 하고 또 다른 세상에서 10여 년을 보내게 될 것을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나는 지금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전 07화 07    정든 집을 떠나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