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봤다. 거실은 소파며 액자, 에어컨, TV가 기대 있던 벽에 먼지로 검은 줄이 가로, 세로로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고 텅 비어 있어 황량해 보였다.
“아빠, 우리 이제 떠나는 거야?”, “응, 이제 이 정든 집과 안녕하는 거야.”
아들과 주고받는 소리가 벽과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지난 주말 이 집에 모든 것을 깨끗이 치웠다. 이사라고 하기보다 ‘치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했다. 결혼 10년 차가 되던 해, 우리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이 신혼 때 마련했던 살림살이 대부분을 새것으로 바꿨다. 아내의 마음에 드는 가구와 가전을 사기 위해 긴 시간을 두고 수도 없이 발 품을 팔았고, 10년쯤 되는 연륜에 맞는 근사한 세간들이 하나씩 들어와 제자리를 잡을 때마다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순간들이 너무 또렷해서 어제 일 같이 생생했다.
“얼마 전에 산 가구와 가전들이 좀 아깝지? 이럴 줄 알았으면 모두 바꾸지 않았을 텐데?”
“ 괜찮아, 나중에 다시 새것 사주면 되지.”
아내는 나와 달리 모든 일에 신중하고 계획적이다. 그런 아내에게 최근 몇 개월 사이에 내가 벌인 이 일이 몹시 당황스러웠을 게다. 쓸고 닦아 가며 애정을 쏟기 시작한 예쁜 가구들을 한 번에 잃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단 한 번도 내 계획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마치 곧바로 떠나기로 서로 계획하고 준비한 듯이, 세간들이 창고로 향할 걸 알고도 아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많은 일로 분주한 내 뒤에서 조용히 기다려 줬다.
“ 전기 제품은 주변에 모두 나눠 주거나, 처분해. 몇 년 지나면 쓸 수 없어. 가구만 잘 챙겨서 가져와.”
우리 짐을 맡아 줄 장모의 말을 떠 올렸다. 냉장고, 세탁기, TV 등 전기 제품은 나눠주고, 처분했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가 먼저 떠나고 뒤이어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지방에 사는 장모 집으로 차를 몰았다. 먼저 도착한 이삿짐들이 방 한 칸에 상자각처럼 아무렇게나 흩어졌다가 차곡차곡 블록을 쌓듯 잘 정돈됐다. 하루 자고 가라는 장모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날로 서울로 돌아왔다. 겨울인데 찬비가 차창을 세차게 두드렸고 추위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베란다의 코발트 빛 타일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텅 빈 거실 천장에 물결무늬를 만들었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이 푸른빛 타일에 홀리듯 마음을 빼앗겨 베란다로 나갔다. 거기서 바라본 창 밖의 푸른 들판에는 어둑한 땅거미가 나지막이 내려앉아 있었고, 태양은 수채화빛 노을을 흩어 놓으며 시나브로 스러지고 있었다. 서울에도 이런 정경이 있다니, 해 뜨는 아침과 해지는 저녁 무렵에 이 푸르른 들판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망설이지 않고 이 집을 계약했다. 그런 이 집을 떠나야 한다니......
“아빠, 이제 가자.”
정신을 가다듬고, 집 안을 몇 차례 돌아본 후에, 우리 가족은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