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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례자 May 13. 2024

10 중국에서 집 구하기

  “첫 번째 집은 너무 어둡지요?”, “네”, “둘째 집은 지저분하기도 하고요. 세 번째 집은 5층이고 너무 낡아서.......”, “아이고~참, 행정실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라서 한국 사람들이 어떤 집을 좋아하는지 잘 몰라요. 내가 여러 번 얘기했는데, 그냥 가격에 맞춰서 구해 놓은 것 같애.”     


  S 선생도 좀 힘들었는지, 한숨을 쉬면서 얘기한다.

   이렇게 시작된 T 시에서의 집 얻기는 아침에 시작해서 반나절이나 계속됐지만 마음에 드는 집 찾기는 쉽지 않았다. 방문한 집들은 근무할 학교를 기점으로 동심원을 그려서,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의 아파트 몇 채를 행정실에서 미리 구해 놓고, S 선생과 현지 부동산업자 그리고 내 가족들이 하나씩 돌아보는 중이다.

  2000년도 초반의 중국은 1970년대 서울의 분위기였다. 처음 와본 중국이었지만, 모든 것의 규모가 컸다. 남한 면적의 1/9 크기에 천만이 넘는 인구 밀집도가 높은 도시로 유동 인구가 많았고, 젊은 도시답게  상당수를 차지하는 젊은 사람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활기가 넘쳤다. 서울과 다른 것은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서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였으나 한낮에도 대기는 작은 입자들이 햇빛에 반사마치 먼지 많은 어두운 광 속에 랜턴을  것 마냥 뽀얀 먼지로  탁했차량도 적은데 이따금  메케한 냄새 코 끝을 찡그리게 했다. 사방 어디를 돌아봐도 산이 보이지 않았고 야트막한 언덕 하나 없 끝없는 평지에 녹지 공간이 적은 회색빛 도시였다.

  왕복 16차선 도로는 고속도로 상하행선을 맞대어 붙여 놓은 듯  쭉 뻗어 있었지만, 통행하는 차량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이 되면 도로에는 수백 수천 대의 자전거가 강물처럼 큰 흐름을 이루고 지나갔다. 장관이었다. 엄청난 자전거의 통행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지, 누구 하나 불편한 표정이 없었고 여유로워 보였다. 양복부터 편안한 운동복이며, 특히  여자들은 눈에 띄는 붉은색, 연분홍색 외출복을 잘 차려입었다. 짙은 화장을 했고, 게다가 대부분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자전거 페달을 거침없이 밟아서, 마주 오는 여성들의 속옷이 훤히 보여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야 했다. S 선생 말로는 이곳 젊은 여성들은 외모 매우 관심이 , 자신을 가꾸는  돈을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패션 잡지 등을 보며 자신을 꾸미고, 연애도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어서, 해 질 무렵 공원에 가면 진하게 스킨십을 하는 데이트족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도 했다.

    학교 근처의 주택 일 이백 가구 규모  5층 내외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식 아파트였다. 지은 지 10년 이상된 아파트로 외벽은 보통 회색 페인트가 칠해졌거나 암갈색 벽돌로, 베란다가 없이 주거 공간을 최대한 확장했다. 동과 동 사이는 승용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넓었지만, 조경이 잘된 화단이나 어린이 놀이터 같은 것은 꾸며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파트라고 하지만 규모 큰 연립 주택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국에서 주재원으로 나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거주 지역은 여기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아파트 촌이 형성돼 있고,  음식점, 상가 등 주변 상권이 제법 잘 갖춰져 살기 편다고 했다. 임대료는 학교 근방의 2~3배 정도로, 주재원들은 회사에서 넉넉한 주택 지원을 받아서 대부분 그곳에서 집을 찾는다고 다. 학교에서 지원되는 주택 보조비로 그곳에 살려면 상당한 추가 비용을 내야 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행정실에서 준비한 마지막 집을 보고 나서 S 선생이 말한다.   

   

   “아이고~, 힘들지요? 이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제대로 된 집이 없네. 내가 괜찮은 곳 한 군데 아는 데 한번 가볼래요?” “네 선생님 그러지요.”     


  안내해 주던 부동산 업자가 돌아가고, 우리 가족과 S 선생만 따로 택시를 탔다. 이제부터는 S 선생이 집 안내를 맡았다. 중국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아들과 함께 몇 개월 동안 조선 동포 선생님에게 중국어를 배웠다. 일상에 필요한 기본적인 표현과 숫자, 화폐 단위 등을 반복해서 공부했지만,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행하던 부동산 업자에게 용기를 내서 중국어로 말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색한 표정을 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반응이다. 성조에 따라 뜻이 크게 달라지는 중국어의 특성상 내 발음과 성조가 엉망이었으리라. 나는 그날 내내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입을 물었다.

   신호 대기 동안 바라본 택시 밖의 풍경이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개천이려니 했던 10여 미터 남짓한 넓은 수로는 인도와 대로변에 평행선을 그리며 반듯하게 어어졌는데,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웃통을 벗고 그곳에서 수영하며 목욕하고 있었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 만들어진 이 대규모 수로는 농업용수로, 수자원을 보호하며, 숲과 공원 등, 녹지 공간이 부족한 T 시의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도시 전체를 순환하도록 했다. 인도로 걸어가는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웃통을 벗고 있었다.

   S 선생과 규모가 제법 큰 5층짜리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인민복과 코트를 차려입은 경비에게 S 선생은 웃으며 다가가서 '아이고~ '  중국어로 말하고 나서, 우리에게로 왔다. 중국인에게도 “아이고~”로  말문을 트는 S 선생의 그 큰 목소리에서 나오는 넉살과 친밀감그리고중국어 능력이 부러웠다.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운 기색을 하 , 손으로 입구 차단기를 올려 주었다.

   S 선생의 안내로 들어간 집은 3층에 있었다. 폭이 넓은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가 붉은 철제문을 열쇠로 열었다. 가구가 별로 없는 거실은 넓었고, TV,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은 붙박이 돼 있었다.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마주 보이는 창문의 붉은 벨벳 커튼을 걷자, 킹사이즈보다도 훨씬 큰 침대가 방 한가운데 자리 잡았는데도 나머지 방의 공간도 휑하게 넓었다. 한국식 아파트라면 40평은 됨직해 보인다. 새 주인을 맞기 위해 전체를 개보수했다고 했다. 주방과 싱크대, 개수대도 깨끗했고, 벽은 벽지 대신에 흰색 회벽이 대리석처럼 반듯하게 칠해져 있어서, 창문마다 드리워진 붉은 벨벳 커튼이 유난히 붉고 선명하게 보였다. 새해 벽두에 TV에서 본 붉은 용이 떠올랐다. 안방 창가에서 밖을 보니,   인도 앞에 16차선 대로가 아파트와 나란히 쭉 뻗어 있었다. 여러 집을 보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집은 깨끗했고 넓었으며, 아내와 아들 모두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주택 보조비와 맞았고, 학교도 바로 앞 대로를 건너고 한 번만 더 작은 도로를 지나면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출근길을  아이 손 잡고 등하교할 수 있다는 S 선생의 말에 마음을 굳혔다.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일 매일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망설이지 않고 이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S 선생이 빙긋 웃으며 알려준다. S 선생이 이 아파트에  중학생 자녀 1명과 2년째 살고 있고, 나와 같은 교과인 P 선생도 자녀 3명과 산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배우자들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해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아이까지 포함해 한 줄로 쭉 세우면중학교 1학년부터 6살까지 다섯 명이고 9살 된 우리 아이는 끝에서 두 번째인 셈이다. 선생님들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아이들도 우리 아들을 그들의 무리에 순순히 끼워주고 형 노릇을 해주었다. 낯선 땅에서 잔뜩 긴장했던 아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이 번졌다.

   정문의 경비원에게 S 선생이 특유의 “ 아이고~” 연발하며 너스레를 떨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친근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S 선생은 우리말 아니니 알아듣는 것은 그들의 문제라며늘 당당하고 크게. 중국어를 했다. 그의 중국어 실력 초급 수준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S 선생은 자신의 중국어 대해서     


  “아이고~, 나는 말야, 중국어를 밤에 술 마시면서 배워서 맨 정신에는 안돼. 술 한잔 먹어봐라~.  몸매도 얼굴도 중국 사람 같지,  나를 중국 사람인 줄 안다구.”     


   잠시 후에 부동산 업자와 집주인이 들어왔다. 주방의 6인용 식탁에 앉아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전기 수도 요금은 사는 사람이 내고, 관리비며 집 관련 비용은 집주인이 부담한다고 했다. 집주인은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중국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뚱뚱하고 큰 체격의 그는 뱃속 깊숙이에서 끌어올리는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한참을 떠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쑥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크고 두꺼운 손을 흔들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인 ‘셰셰 셰셰’, 감사하다는 말을 연이어 몇 차례 하서,  한 무더기 열쇠 꾸러미를 내 손에 쥐어 주고 떠들썩하게 하고 나갔다.

  S 선생의 말로는 집주인의 직업은 택시 운전사로, 공산당원인 그는 고향에 부모가 살던 집이 개발돼서 그 보상으로 이 아파트 두 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외국인인 한국학교 교사에게 집을  줬는데, 현지인에게 세놓 것보다 30~40%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어서, 제는 한국인에게만 세를 놓는다고 했다.  집주인이 아까 웃는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한 말은, 한국인들은 집 안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확한 날에 따박따박 월세를 넣어줘서 아주 좋다고 했단다. 

   집주인은 아파트 차고 두 개 중에 하나를 보수해서 10여 평 남짓한 곳에서 산다. 택시 일을 마치면 옷을 갈아입고, 자가용인 검은색 벤츠를 타고 가면서 나를 아는 채 한다. 나중에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쯤에는매주 일요일마다 근처에 사는 그의 부모와 가족들이 큰 음식점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며, 우애를 나누는 것이 중국인 가족의 전통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두가 돌아가고 난 후에, 우리 가족은 그날 밤 그 크고 높은 침대에서 사방에 붉은 벨벳 커튼을 치고, 세상에 이렇게 큰 침대는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놀라서 말하는 아이와 함께, 뒹굴뒹굴하며 아침이 올 때까지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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