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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례자 May 14. 2024

12 타인들의 방랑과 정착 사이에서

  하루일과를 마치는 복잡한 하교시간, 중국 T 시의 한국국제학교 정문에서 어슬렁 대는 그를 처음 보았다. 학교는 중국학교와 같은 건물이고 큰 시장의 입구와 맞닿아 있어서, 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하교하는 아이들이 뒤섞여  아주  복잡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공식적으로 자녀 하나만 낳을 수 있었다.  방과 후에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 나와 손자 손녀를 마중 나온 인파로 학교 앞은 시골 장날처럼 늘  떠들 법석 했다.

   속에서도 그는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낡아 변색된 소매 끝과 목덜미 깃 부분이 헤어져 실밥이 하얗게 일어난 낡고 헐렁한 인민복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깡마르고 새까만 얼굴에 퀭한 눈으로,  나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어떤 적의나 공격성이 엿보이지 않았고, 먼 산을 바로 보는 듯한 멍한 눈길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한눈에 그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간 경험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전혀 다른 장소에서도 이따금 만났다. 일요일이면 한국인들만이 호텔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그는 일요일에 간혹 호텔 주차장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몇 차례 말을 붙이고 앞면을 튼 후에야, 그가 불법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난을 해결하려 야밤에 혼자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입국했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그의 가족들을 북한에서 데리고 나와, 한국에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꿈이라 했다. 그 후에 그를 한 두 번 만났고,  내가 한 일이라야 고작 몇 번의 간식과 신약 성경을 읽어보라고 건네주던 기억뿐이다. 인민복 상의 포켓에 성경과 간식을 성급히 찔러 넣고 주변을 살피며, 긴장으로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본 것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 나는 그를 애써 찾지 않았고, 그렇게 T 시를 떠나 나는 H 국으로 갔다.


  두 번째 만난 방랑의 사람들은 H 국 한인교회에서이다. 조선족 동포들과 그들과 함께 한 북한 이탈주민들이다. 그들은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야밤에 어선의 밑창에 숨어 불법 밀입국한 절박한 사람들이다. 길거리에서 H국 경찰이 불심검문을 할 때면 그들은 골목골목을 돌아서 피해 갔다. 검문에서 신분이 발각되면 즉각 추방되고, 밀입국으로 빌린 거액의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큰 낭패를 겪는다고 했다. 그래서 거리를 다닐 때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늘 주의를 예민하게 살폈다.

  그들은 중국과 가까운 시 외각의 허름한 집에 공동 거주하면서,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한 특성을 살려서 H 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집에서 시간제 가정부 노릇을 했으며, 일부 교원 출신은 중국어 레슨을 했다. 그렇게 번 돈의 대부분은 중국으로 송금해서 중국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가족들을 부양하며 살았다. 수년만 일하면 아이들 대학도 보내고 집도 살 수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H국에 넘어오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얼굴에서 주눅 들거나 어둡고 비굴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힘찬 대륙의 기운이 있었다. 소수였지만 그들끼리 똘똘 뭉쳐서, 불완전한 신분과 환경에서 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만큼 활달한 표정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웃음으로 주일날 함께 어울려 예배드리고, 식사 봉사를 하며 즐겁게 지냈다. 그들 강하고 억센 억양과 짧고 재치 있는 말투로 자신들의 생각을 언제나 명확하게 말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다.

   아내는 교회에서 대여섯 명인 그들 그룹을 담당했다. 일주 일에 한 번씩 그들과 만나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자녀나 가족들이 H 국에 방문할 때면 새벽 예배를 마치고 함께 자리를 옮겨 아침 식사로 얌차(다양한 중국식 만두와 차)를 나누며 우애를 나눴다. 그들 중에 일부는 북한이탈주민이었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했으며 시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안정된 여건에 사는 우리들보다 오히려 웃음과 활력이 넘쳤으며 정과 눈물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족이 H 국을 떠나올 때 정성껏 마련한 선물과 함께 손을 맞잡고 애잔한 눈빛으로 눈물 줄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하던 정 많은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나는 방랑과 정착으로 고뇌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북한 이탈 주민의 자녀들로, 나는 격주 토요일에 그들을 만난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H 국의 기억이 떠올라 우연이 이 일을 시작했다. 1명의 학생 2주에 한 번씩 만나, 3~4시간 동안 국어나 영어를 가르치고 남한의 삶에 적응하고, 진로를 상담하는 일을 했다. 작년에는 중학교 1학년, 올해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을 만났다.

    이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쳐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봉사는, 내가 이들보다 낫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교만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첫날부터 내게 깨우쳐줬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내게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 주고 헤어졌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그들이 던져 준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겨 보며,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하차할 역에 도착하곤 했다.

   이들은 남한 사회를 아주 짧은 시간 경험했고, 우리 사회의 언어와 문화를 모두 잘 이해하지 못는데도, 먹고 살아갈 문제와, 대인관계, 타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눈길과 소통 방식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명쾌하게 정리했고,  분명하게 말했다.

   북한 이탈 학생 몇 명을 만나고서 이들의 생각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고, 다른 성장 배경을 가졌는데, 또렷한 공통분모를 지녔다. 처음 한 달은 아이들에게서 ‘네’, ‘아니요’ 외엔 별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대화 중에 이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거나 창밖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애써 말문을 트고 제법 신나게 세 시간을 보내고 나서 이젠 가까워졌겠지 하고, 집에 돌아와 카톡을 하면 대부분 무응답이다. 마지못해서 짧게 ‘네’만 한다. 몇 주간 친해져서 됐거니 하고 2주 만에 다시 만나면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면대면 대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한국의 대중문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여학생은 아이돌의 춤에, 남학생들은 인터넷 게임, 유튜버 등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어른인 내가 깜짝 놀랄 만큼 현실적인 살림살이 문제의 세세한 부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때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던, 미래에 뭘 먹고살아야 할 지에 대한 문제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살아가는 일, 돈 버는 일에 현실적이었다. 여러 번 작은 선물을 주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본 질서에 대해 매우 고지식하고 정직했으며, 중학교 남학생끼리 어울리면서도 그 흔한 욕설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바르고 정직한 것에 대한 분명한 잣대가 있었다. 성공이 물질적 성취라는 분명한 등식을 갖고 있었고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부모가 살아온 인생이 가르쳐준 것이리라. 물론 그에 따르는 노력이나 공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딱히 없었다.

   어떻게 하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그들의 심성이 상처받지 않고,  남한의 토양에 잘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게 할지 나는 여전히 몰랐다. 하지만 이들이 이 땅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남모르게  애쓰고 수고하는 선생님들이 많았고,  나는 그들을 통해 조금씩 배워 나갔다.


   이런 조각된 나의 경험들은 통일 학교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씩 퍼즐이 맞춰졌다. 그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북한 이탈주민의 남한에서의 삶과 자녀 양육에 대한 강한 집념, 그로부터 비롯된 북한 이탈 청소년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표현 방식도 서서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 관련 각 분야 전문가들이 매주 전하는 생생한 강의를 듣고서야, 막연히 알았던 북한에 대한 표면적 정보와 수치로 추정한 이해를 넘어서 살아 있는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늘꿈 학교>의 5분 영상 ‘돌 위에 핀 꽃’을 보았다. ‘우리는 길거리에 던져진 돌’ 같은 존재라는 그들의 고백과,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통해, 그동안 만났던 학생들이 보여 준 무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즈음에 이들에 대한 내 기억의 조각들이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갖춘 그림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열정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북한 이탈 주민들을 이해하는 내 지식의 언저리들이 선명하게 아로새졌다.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 통일 한국을 꿈꾸며, 북한이탈주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돕는 무수한 사람들의 손길이 뜨거운 용광로가 돼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푸집에 부어내고 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전 세계에 흩어져 방랑하는 북한 이탈주민들이 이 땅에 모이, 남한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거푸집을 털어내고,  모든 민족이 하나 되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됐다. 하나 된 나라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날이 머지않아 오리라는 막연한 믿음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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