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교의 한편 건물과 운동장을 빌려 썼던 T 한국국제학교는, 80년대 한국의 공립학교를 그대로 옮겨 온 듯 직사각형의 상자갑 두 개를 기역자로 붙여 놓은 낡고 볼품없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학교 안은 밝고 활달한 아이들의 표정과 눈부시게 부서지는 웃음소리로 칙칙한 주변 환경을 환하게 만들 만큼 늘 활기차고 생기 넘쳤다. 소규모 해외 학교의 특성상,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한 건물 안에 있었다. 노란 원복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암탉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들같이 선생님 뒤를 '병아리 삐약삐약, 오리 꽥꽥'하며 학교 곳곳에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즐거움이 있는 학교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중학교 2학년, 3학년, 고등학교 1, 2, 3학년 수업에 들어갔고, 정규 수업 교과서만 다섯 권이었다. 수업 준비도 벅찼지만, 학기가 시작되면서 출제 준비를 함께해야 할 만큼 시험 출제 분량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모두 편했다. 교재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 학교 특성상 행정 업무가 적었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생들이 내게 늘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학생 개개인의 반응과 특성에 주목할 수 있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는 여전히 아이들의 얼굴 생김과 머리 모양, 표정과 눈빛, 말할 때의 입모양과 함께 얼굴을 떠올리면 목소리와 음색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맑고 큰 눈에 두 갈래로 머리를 단정하게 딴 혜민이는 중국에 온 지 5년 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말을 천천히 하며 상대의 반응을 눈으로 살피는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잘했다. 시인을 꿈꾸는 혜인이는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책을 잔뜩 사 와서 열띤 얼굴로 내게 책 목록과 내용을 소개하거나, 이따금 창작 노트에서 자작 시를 보여주며 잔뜩 긴장한 눈으로 내 평가를 숨죽여 기다리곤 했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중3 은미는 가수 나미를 많이 닮았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늘 밝고 경쾌하게 말했다. 중국에 온 지 1년 됐고, 세상에서 중국어가 가장 싫다고 했다. 아버지가 중국 주재원으로 나올 때 함께 온 것을 후회했다. 은미와 같은 아이가 적지 않았는데 얼마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중국어도 잘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쇼핑할 때쯤 되면 불평도 사라졌다. 중국어를 잘하는 아이들이 곁에 다가가. 중국어 숙제도 도와주고 주말에 함께 쇼핑을 하다 보면 이곳 생활이 즐거워졌다.
큰 키에 깡마르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고1 민기는 에너지가 많은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직장 일로 늘 바빴고 해외 출장도 잦아 집을 자주 비웠다. 방과 후 플루트 수업을 마치면, 중학교 1학년 동생과 하교 길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시장을 봐서 집으로 간다. 한 번은 등교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두 형제가 모두 등교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아버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학교에서 10분쯤 떨어진 민기의 집에 갔다. 한참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두 녀석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문을 연다, 아버지는 출장 갔고, 늦게까지 놀다가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가 없어서인지 민기는 동생을 끔찍이 돌보고 챙겼다. 체육학과를 진학해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민기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가족애를 메우고 동생을 돌보는 힘이 되는 것 같았다. 민기는 집안 살림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다.
둥근 얼굴에 홑까풀의 크고 둥근 눈을 가진 고3 선영이는 자신의 생각보다 늘 엄마의 소망을 먼저 생각하는 크고 듬직한 아이였다. 의사를 열망하는 엄마의 기대에 맞춰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이따금 자신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 번은 방과 후 자습 시간에 한 여학생이 교무실로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선영이가 화장실에서 쓰러졌다는 것이다. 다른 여학생과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서 쓰러져 있는 선영이를 양호실에 업어다 주었다. 빈혈이란다. 그는 언제나 수학이나 영어 문제를 묻는 친구들에게 열띤 표정으로 손짓을 해가며 설명하고, 메모까지 붙여주는 착하고 정성스러운 아이다. 진로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집 근처 맛집을 돌아다니며 풀었다.
고3 태현이는 말수가 적고 까칠해서 친구 없이 혼자 지냈다. 중국어 수업을 특히 어려워했고 싫어했다. 무뚝뚝하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그가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나중에서야 지적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상대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큰 눈을 껌뻑거리며 말하는, 고3 혜민이는 학생 회장의 역할을 잘 해냈다. 학교 행사를 주도하는 리더십이 뛰어났다. 중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고 매사에 열정이 많은 아이다. 학교 체육대회나 축제를 진행할 때, 프로그램을 미리 만들어서 선생님과 의논하고 학생들에게 설문을 돌린다. 언론인이 꿈인 혜민이는 사회 문제와 학교 정책에 대해 열띤 주장을 펼치며 논쟁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누군가 문제가 생기면 혜민이를 중심으로 모이곤 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늘 아이들이 많았다.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은 해외 주재원으로 부임했거나, 외교관, 현지 자영업, 사업 등을 하는 부모를 따라온 학생들이다. 대기업의 주재원이나 외교관의 자녀들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많았고, 그들 중의 일부는 T시의 영국, 미국계 국제학교에서 몇 년 간 영어 공부를 하다가 한국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T 한국국제학교로 전학을 왔다. 일부 학생들은 현지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부모와 함께 거주하며 10년 넘게 중국에 살아서 중국문화와 중국어에 능통했고, 그들 중에 일부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렵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의 가정형편과 교육 배경의 스펙트럼이 한국보다 훨씬 컸다.
고 1을 포함해서 3년 이상의 해외학교 재학 증명과 부모의 동반 거주를 입증하면, 특례입시(중고교해외이수자전형) 조건을 충족한다. 이 일을 10년 한 내가, 만약 부모라면 공부 잘하는 자녀를 해외에 데리고 오지 않을 것이다. 특례(3년) 입학 정원은 수십 년 간 모집 정원 내 3%로 묶여 있고, 명문 대학 인기학과는 고작 한 두 명만 선발한다. 전 세계의 해외재학생들과 경쟁하기 때문에 갖춰야 할 스펙이 너무 많다.
물론 자녀의 학업 능력이 부족해 한국의 중하위권 4년제 대학 입학이 어렵다면, 특례 입학은 좋은 기회다. 한국보다 쉽다. 특례입시와 함께 한국 학생과 동일한 수시와 정시 입시 준비를 할 수 있지만, 서류 제출 기회는 한국 학생들과 똑같다.
소위 SKY를 가기 위해서는, 미국공인학력평가 시험(SAT)이나 AP, 영국공인학력평가 시험(GCSE, IGCSE, IB)을 비롯해서 각종 어학시험(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등)을 따로 준비하는데 학습량이 많고, 한국 대학은 미국의 최상위 대학 입학 성적을 요구한다. 따라서 12년 특례자전형 자격이 있는 학생이 아닌 이상 명문대 진학은 오히려 한국에서 가는 것이 훨씬 쉽다.
내가 유독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관계성이 갖는 힘이다. 이들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새로 전학 온 아이가 어려움을 겪으면 밀착해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고민을 들어주며, 서로를 돕는 일에 망설이지 않았다. 서로 좀 더 친한 작은 그룹도 있었지만, 문제가 생기면 하나로 모여 요란하게 다투고 시원하게 해결했다. 필요하면 언제나 흩어져 하나로 모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자의 꿈을 향해 서로를 격려하고 돌보며, 뒤쳐진 아이들을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함께 해나갔다.
나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돌이켜 보았다. 한국의 아이들은 늘 긴장과 피로를 호소했고, 개인적이고 경쟁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무한 경쟁의 분위기에 던져진 사회와 학교, 학부모에 의해 학생들이 가혹하게 끌려가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괜찮았던 아이들이 수행평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가 되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심해지고, 시험 문제에 대한 논쟁과 수행평가와 서술형 답안 채점에서 1, 2점에 극도로 민감해져서, 학생과 부모가 끊임없이 민원과 분쟁을 일으킨다.
나는 학생들이 어떤 행동을 하건 이해할 수 있었고, 부모의 맹목적인 태도도 미워하지 않았다. 사회구조가 그들을 뾰족하고 사납게 만든 것이다. 성적과 서열,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가 피폐해지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모두 다 상처 입고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행복한 학교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와 낯선 중국 문화에 적응하고 전혀 다른 입시을 준비 하느라 더 힘 겨울 수 도 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상담할 정보도 많지 않았지만, 교사에게 묻고,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면서 학교 생활을 해 나갔다. 서로를 향한 이들의 따뜻한 배려와 격려, 울고 웃으며 나누는 정은 가족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학생과 학부모 모두 교사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신뢰를 보여 준다. 그래서 나의 해외 생활은 더 길어졌고, 즐거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