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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례자 May 13. 2024

11 첫 출근, 첫 등교, 그 설렘

  아들과 손잡고 가는 이 길이 어찌나 즐겁던지 아이는 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며 깡충깡충 뛴다. 내가 소망하던 일이 이뤄진 것이다.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첫 등교일, 나는 중국 T 시의 한국국제학교 고등부에 첫 출근하는 길이다. 아파트 입구에 나서자 처음 본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리어카들이 인도를 따라 끝없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이 리어카마다 시끌벅적하게 모여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가가 봤다. 리어카에서는 아침을 팔았다. 중국에 들어온 뒤에 보통 낮과 밤에 움직였던 터라, 이른 아침의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리어카는 음식을 파는 일종에 푸드 트럭이었다. 사람들은 순두부를 한 덩이 넣고 그 위에 연한 소스 간장을 부은 투명 비닐 주머니나,  얇은 밀가루 도우 같은 곳에 몇 가지 야채를 얹고 소스를 뿌려 즉석 해서 만든 큼직한 밀전병 같은 것을 서둘러 사서 출근을 했다. 중국 회사원들은 출근길에 길거리 음식 리어카에서 아침을 사서 출근하면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아침이면 어디선가 무수한 음식 리어카가 나타났다가,  아침을 팔고 나면 순식 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출근 시간에 보는 수 천대의 자전거 물결은, 몇 번째 보았는데 여전히 적응이 안 돼서 놀랍기만 했다. 신호등이 켜지면, 그 거대한 물결이 일시에 멈춰서 마치 큰 댐에 갇혀 멈춰진 물이, 수문을 개방하면 곧바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횡단 보다 앞에서 선 아들은 어린아이답게 오른손을 번쩍 들고, 16차선의 도로를 가로질러서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넜다. 학교 가는 방향의 인도를 걸어가는 동안 2미터 정도 아래로 10미터 폭으로 가지런히 뻗은 수로는 가뭄 탓에 물이 많지 않았지만, 천천히 흘렀고 손을 담그면 검은 물이 배일 것 같이 어둡고 탁했다.

   작은 도로를 막 지나서 넓은 시장 입구와 맞닿은 곳에, 4층 높이에 푸른색 페인트 칠을 한 기역자로 꺾인, 제법 규모가 큰 낡은 건물 앞에 섰다. 중국의 중학교 건물이었다. 제1중학이라는 학교 이름이 건물 상층의 정면에 붉은색 한자로 가로로 크게 쓰인 건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제1은 첫 번째를 의미하며, 이 학교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우수한 중학교라는 뜻이다. T시의 한국국제학교는 이 학교의 일부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한다. 두 학교는 중간 담장이 있고 작은 문을 통해서 오갈 수 있었다. 정문의 입구도 달랐다.

  

   나는 아들과 함께 학교로 들어갔다. 폭이 3미터 정도 되는 정문의 양쪽에는 크리트 기둥에  T 한국국제학교라는 한자 명패가 붙어 있었다. 안에는 황톳빛 마사토가 깔린 타원형의 운동장이 있었고, 정면에 4층 높이의 직선형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 잡았다. 큰 공장 건물 같기도 하고, 오래전 내가 다니던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 건물처럼 낡았다.

   아이와 함께 교무실로 가서 아들의  담임 선생님에게 인사드리고 아이를 맡기고, 나는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 선생님과 행정 실장님이 새로 부임한 선생님들을  맞고 있었다.      


     “ K 선생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국에서 다시 만나네요. 이제 우리가 한 식구가 됐으니, 이곳에 사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사십시다.”  “네,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K 교장과 P 행정 실장은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서울의 면접 시험장에서 만났다. 그때 그들은 내 교과 지식과 교육관에 대해 사무적몇 가지 질문을 마친 후에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중국엔 가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직.....” “중국 생활이 녹록지는 않을 겁니다. 현지 물가가 많이 싸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금방 들 것입니다. 괜찮겠습니까?” “가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많은 선생님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니 저도 잘 적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좋습니다. 그럼 중국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서류 경쟁률도 높았고, 면접도 3대 1이었는데, ‘중국에서 만납시다’는 합격을 암시하는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합격자 발표는 1주일 뒤였고, 나는 최종 합격했다.

  그해에 6명의 초등 선생님과 3명의 중등 선생이 함께 부임했다. 학교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한 건물 안에 있었고 재학생의 숫자가 대략 200여 명 정도 됐다.

  교무 부장인 S 선생의 안내를 받아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 야~. 모두 자리에 앉아. 오늘부터 너희들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서울에서 오셨다. K 선생님이시다. 첫인상이 중요해. 모두 착한 학생이라는 걸 보여줘야 해~. 알았지” “네~”     


   고등학교는 각 학년이 한 반씩 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차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고2는 한 반이었는데, 20여 명의 학생 중에 여학생이 더 많았,  모두 호기심에 어린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환영했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보다 첫 만남에 더 신경을 썼다. 이곳은  완전히 남의 나라, 남의 땅이고 지나치는 풍경, 마주치는 사람 모두 내 눈과 귀에  낯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중국식 한자(간자체)고 학교에 오는 동안 스쳐가는 사람들의 중국어 말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공간만이 한국어를 넘치도록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반응에 더 긴장했는지도 모른다. 서로 말을 하고 떠들다가도, 내가 말을 시작하면 아이들은 나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로 주의를 줘가며 주변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의도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었다. 

   나는 이곳 학교의 교육과정에 빠르게 적응했다. 한국의 필수교육과정에 최소 단위를 이수하고 원어민 수업을 통해 중국어와 영어에 많은 시간을 배분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한국대학교 진학을 원했고,  대학 입시에서 국어 시험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고, S대학의 입시가 국어 논술이어서 학교에서 입시를 가장 잘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 집중도는 놀랄 만큼 높았다. 졸거나 딴짓을 하거나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은 모두 한국어 사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생활이 적게는 1,2년에서 심지어는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있을 만큼 국어 실력의 편차가 매우 심했다. 한국의 교과서와 부교재를 이용해서 공부하는 매 수업시간이 즐거웠다.

  

   한국에서의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수업 때마다 20~30%의 학생들은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엎드려 자거나, 딴짓을 하고 일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학원 공부를 하기 일쑤였다. 학생들을 수업에 집중시키기 위해 안감힘을 써야만 했다.   그에 비하면 이곳에 아이들은 반응이 아주 좋았다. 수업에 집중할 뿐 아니라 질문도 많았고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찾아와 묻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담임 반 학생이기도 했지만, 채 한 달도 안 돼서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K 쌤’ 이라거나 일부 여학생들은 ‘아빠’라고 불러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들은 단순히 호칭뿐 아니라,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몇 명씩 다가와 팔짱을 끼거나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며 나를 그들의 무리에 끼워줬다. 아이들은 궁금하면 망설이지 않고 물었고 불편한 마음이 들면 주저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의사를 전달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솔직한 소통의 방식이어서 좋았다.

  

   서울에서 나는 신학기가 시작되는 매년 3월이면 목의 통증을 달고 살았다. 이비인후과를 들락거리며 아픈 목을 가다듬으며 수업을 하느라 곤욕을 치르며 새 학기 맞이을 해야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첫 학기 3월은 너무나 가볍고 상쾌했다. 몸도 마음도 목도 가벼웠다.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웠고 수업도 재미가 있었다. 방과 후에 이어진 능력별 국어 보충 수업도 아이들이 강력하게 원해서 개설됐고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서 한국대학특례 국어 준비와 논술 시험 준비를 체계적으로 준비시킬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오니, 아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이는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바탕 하고 올라왔다고 한다. 빨갛게 상기된 이마와 얼굴에는 온통 땀범벅이 됐는데 표정이 밝았다.     


   “ 아빠, 학교 수업이 아주 재밌어. 선생님도 친절해. 중국어는 좀 어렵지만, 수학과 국어, 영어는 쉬웠어. 수업 끝나고 얘들하고 축구했는데 아주 재밌었어. 내가 한 골 넣었어. 축구를 잘하니까 얘들이 나를 되게 좋아해. 서로 자기편으로 데려가려고 다투고 난리 났어. 너무 재밌어.”     


  아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찡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중국에서의 첫 시작은 기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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