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들이 병아리처럼 줄지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T 국제학교 운동장을 한가롭게 거닐었다. 황토색 마사토가 아무렇게 깔린 운동장을 거니는 것이 지루한 생각이 들 즈음에 옆에 있는 중국 학교가 궁금해졌다. 조심스레 담장 옆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눈부신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거리는 작약, 붉은색 모란과 붉은색, 분홍색, 흰색을 꽃피운 매화나무가 운동장 가장자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고, 중앙 국기 게양대 건물 앞에는 잘 정돈된 화단의 꽃들과 함께 솜사탕 모양으로 다듬은 플라타너스의 짙푸른 녹색이 회색빛 낡은 건물을 둘러서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냈다. 그 모습에 푹 빠져 한동안 정원을 돌아보고 있는데, 훤칠한 키에 편안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뒷짐을 지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학교 교장 왕 씨입니다.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내가 이웃학교 한국인 교사라고 얘기하자, 그는 호기심과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중국에 언제 왔는지, 중국에 와 보니 어땠는지, 가족에 대해, 가르치는 과목은, 사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궁금한 것을 연이어 물었다. 대답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다음 질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얘기하다가, 그는 40년을 일한 자신의 월급이 한 달에 4천 위안(한화 55만 원/환율 138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왕 교장은 교육이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며 학교 교육에서 조국애를 가르치는 것이 중국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한 손을 치켜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 선생은 우리 학교 중국어 선생님이다. 40살 한족 남성으로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이고 6살 아들이 하나 있다. 그런데 지난주에야 결혼식을 올렸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신부가 캐딜락 리무진을 타고, 들러리들이 5대의 벤츠에 나눠 타고 결혼식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런 풍습을 "레드 카펫 웨딩(Red Carpet Wedding)"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 결혼 문화 중 하나로, 중국인들이 결혼식을 축제 분위기로 즐기고, 또한 사회적 지위와 부에 대한 과시의 성격도 갖는다고 했다. 나는 결혼식과 피로연에 모두 참여했다. 중국에서는 남성이 집 없이는 결혼이 어렵다. 집도 사야 하고, 신부 가족에게 '빙금(聘金)'이라 불리는 혼수금을 지불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인데 북경 같은 도시에서는 집 값을 포함한 빙금의 규모가 10-30만 위안(약 1.5~4.5억 원), 부유층은 50만 위안(약 7.5억 원) 이상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니, 한국에서 태어난 게 감사했다. 결혼도 못할 뻔했다. 그는 혼수금이 없어서 먼저, 아내와 살다가 아이를 낳고, 자신들이 지난 10년 간 돈을 모으고, 양가 집안에서 도움을 받아, 충분한 준비가 된 후에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 결혼식은 주로 호텔이나 대형 식당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중국 대도시에서는 결혼식 비용이 상당했다. 특히 호텔이나 고급 식당 예약, 연회 비용 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 전통문화에서 결혼은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축제를 벌이는 중요한 의식이며, 1박 2일 결혼식 형식은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T 대학 사범대 중국어과 여대생 린은 나와 우리 가족의 중국어 과외 선생님이었다. 아담한 체격에 말씨가 고은 그녀는 나이 답지 않게 여유로웠고 친절했으며, 우리 가족에게 성실하게 중국어를 가르쳐주었다. 빈 수업 시간에 학교에 찾아와 내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우리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와 중국어를 공부했다. 특별히 가르쳤다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우리와 같이 보냈다. 주말마다 T시의 시내와 공원을 함께 다니며 중국 문화를 소개하고 함께 식사하고 차를 마셨다. 과외를 '후다오'라고 하는데, 중국어로 "后到" 또는 "补习"라고 표현한다. 시간당 20위안(2800원)으로 아주 싼 편이어서 우리 가족은 린 선생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별 부담이 되지 않았다. 린 선생은 결혼 상대가 있었지만, 남자가 아직 직장을 못 구했고, 결혼 혼수금 준비가 안 돼서 더 오랜 시간 돈을 모아 결혼할 계획이라 했다. 기회가 된다면 홍콩으로 가서 직장을 구하고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퇴근길에 늘 만나는 과일 장수 양 씨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사람이다. 그는 집 근처 대로변에서 리어카에 수박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판다. 넉살이 좋아서 누구에게나 삼각형으로 잘 자른 붉은 수박을 건네면서 맛을 보라고 한다. 그는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나를 붙잡고, 수박 한 조각을 건네며 수다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다짜고짜 내게 한국 선생은 한 달에 얼마 버냐고 묻는다. 자기는 한 달에 5천 위안을 벌고, 언제나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으면 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중국 대도시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했던 직업은 은행원, 공무원과 교사 등 안정적인 공공 부문의 직업, 그리고 전문직이었다. 당시 중국 은행원의 평균 월급은 약 2,000-3,000위안(약 28만-42만 원) 수준, 일반 회사원은 1,500-2,000위안(약 21만 원-28만 원)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수박 장사 왕 씨의 수입은 일반 회사원의 두 배가 훨씬 넘었으니, 거드름을 피울만했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을 시작한 것은 1978년 개혁개방 정책 이후이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중국은 급속도로 외국문화를 받아들였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크게 증가했다. 내가 만난 중국인들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중국인들의 태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들이 얘기 끝에 예외 없이 내가 얼마 버는지를 궁금해하고, 자신들의 벌이를 얘기한 것은 자본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대에 물질에 대한 궁금증이 그만큼 증폭된 때문이리라. 그들은 더 이상 외국인을 어색하고 낯선 존재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며,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