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심을 고추모를 사러 근처 육묘장을 찾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다른 사람들은 벌써 고추 모를 다 심었는데 왜 이제야 왔냐고 한다. 작년에 남들보다 서둘러 심었더니 냉해 때문에 결국 고추는 구경도 못해보고 고춧대를 모두 뽑아냈다고 했다. 그래서 올해는 욕심내지 않고 느긋하게 조금만 심는다고 했다.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본인이 잘못이라도 한 듯 연신 미안해하며 수박과 참외 모종을 덤으로 얹어 준다. 고추모를 사러 갔다 팔자에 없는 수박밭, 참외밭을 만들게 생겼다.
수박, 참외를 심을 곳은 애초부터 따로 없었다. 할 수 없이 옥수수를 심으려고 만든 고랑에 이 두 녀석을 심기로 했다. 모종을 심고 나니 저녁부터 봄비가 흠뻑 내린다. 시작부터 좋은 징조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밭고랑에 안개처럼 자동으로 물이 나오는 호스까지 설치하지만 우리 밭에는 그런 시설이 있을 리 없다. 햇빛도 물도 하늘이 주는 대로 맡겨야 한다.
주말이 되어 텃밭에 가보니 수박, 참외 모종에 생기가 돈다. 뿌리를 잘 내리고 어디로 가지를 뻗을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다. 물을 주면 좋아할 듯싶다. 한낮에 갑자기 차가운 지하수 물을 퍼부으면 어린 모종이 놀란다니 미리 받아놓은 물을 조루에 가득 채워 흠뻑 뿌려주었다. 초보 텃밭 농사꾼이 처음 해보는 수박, 참외농사는 어린아이 키우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여름이 다가서면서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텃밭에 제초제를 한 방울도 치지 않으니 온 동네 잡초들이 우리 집 텃밭에 모여 잔치라도 하는 듯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밭에 나는 모든 풀이 다 잡초는 아니다. 비듬나물도 있고 아내가 좋아하는 가마중도 있다. 쇠뜨기도 한때는 몸에 좋다고 해서 귀한 대접을 받던 풀이다. 다만 필요한 자리, 제자리에 있지 않으니 모두 잡초요 뽑아야 할 대상이다. 주말마다 밭에 나가 잡초를 뽑았지만 사람 손으로는 감당할 수는 없다. 결국 풀 뽑기를 포기하면서 잡초도 적당하게 있어야 밭이 더 건강한 법이라며 스스로 위로하고 말았다.
유튜브를 보니 수박과 참외를 제대로 키우려면 순을 질러 주어야 하고 꽃도 솎아내서 한 줄기에 하나 둘씩만 달리도록 해야 한단다. 가위를 들고 수박, 참외 밭에 가려다 멈추었다. 풀까지 내버려 두는 판에 잡초들을 헤치고 씩씩하게 줄기를 뻗은 수박, 참외 줄기에 가위질을 할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내가 수박, 참외를 내다 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생기는 대로 놔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 주먹만 한 수박과 알밤 같은 참외가 이곳저곳에서 지천으로 매달리기 시작한다.
한 여름으로 접어든 지난 주말에 우리 집 텃밭으로 아내의 친정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장모님 추도식이다. 조만간에 결혼식을 올릴 처조카 둘이 각자의 예비 신랑과 신부까지 대동하고 참석했다. 당신이 업어 키운 아이가 벌써 커서 결혼을 한다니 장모님도 하늘나라에서 흐뭇해하실 듯하다. 때맞추어 텃밭에서 수박과 참외가 제법 잘 익었다. 농약 한 방울 치지 않았는데 풀과 경쟁하면서 잘 자라주었으니 대견스럽고 고맙다. 장모님이 하늘나라에서 비를 잘 뿌려주고 햇볕도 듬뿍 쪼여주신 모양이다. 크기는 작아도 야무지게 영근 모습이 탐스럽다.
첫 수확한 못난이 수박과 참외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난다. 풀밭에서 컸으니 그럴만하다. 또한 수박과 참외를 뒤섞어 심었으니 수박에서는 참외 맛이 나고 참외에서는 수박 맛이 나는 듯하다. 내가 키운 첫 수박과 참외는 모양도 시원찮고 마트에서 사 온 것보다 단 맛도 덜하다. 그래도 자연 그대로의 싱싱한 맛이 아주 매력적이라며 먹을 만하단다. 먹고 남은 수박과 참외는 화채로 만들고 수박주스까지 만들어 마시며 잔치를 벌였다.
내년에는 수박 따로, 참외 따로 제대로 농사를 지어봐야겠다. 올해처럼 잘 자라준다면 장모님 선물이라며 텃밭에 오는 사람에게 수박과 참외를 한 덩어리씩 안겨주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텃밭 농사의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