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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3. 2023

할 또는 할머니

  아기가 옹알이하다 한두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하면 온 식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드디어 애물단지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신기하기 그지없다. 며느리는 엄마 소리를 처음 들었다고 감격해한다. 한술 더 떠서 애가 글쎄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다시 한번 해보라고 아이를 어르기도 한다. 


  첫 손녀가 처음 한 말은 엄마라는 말 외에 “할~”이었다. 맨 처음엔 아무한테나 엄마라고 했다가 할머니라고 해보라니까 세 음절을 다 발음하지 못하고 부르는 말이었다. 나한테도 안아달라거나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때마다 똑같이 “할~”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부터 “할머니”, “할부지”라고 발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처음 들어보니 반가우면서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환갑도 안 됐는데 우리가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다니 그때는 그렇게 불릴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눈치라도 챘는지 얼마쯤 후부터 첫 손녀는 ‘할~’과 ‘할머니, 할부지’를 번갈아 쓰기 시작하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것이 쑥스럽고 어색했던지 아내가 입술에 세로로 손가락을 얹으면서부터 할머니라는 말은 “할~”이 되었다. 가만히 보니 아기 치즈나 곰 젤리같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조를 때는 ‘할~’이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김없이 “할머니”, “할부지”로 부르는 것이다.


  아직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지도 못하는 아이가 우리를 골려 먹는 방법을 보면 재미있다. 아기가 기분이 좋거나 신나면 우리 호칭은 무조건 “할~”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떼를 써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여지없이 우리 호칭은 “할머니, 할부지”로 바뀐다. 할~소리가 재미있어서 한번 해보라고 달래고 얼러보아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딱 돌아서서 시침을 뗀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야 그 비싼 목소리로 딱 한번 “할~”하고 부르면서 냅다 도망친다. 나중에 태어난 동생들도 하미, 하부지로 발음은 조금씩 달랐지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말을 배워갔다. 


  어린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인공지능이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과는 아주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인간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주 적은 데이터를 가지고도 내재된 언어 문법 체계를 활용하여 감정을 포함한 의미를 전달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또한 어떤 때는 아이가 듣도 보도 못한 말을 하여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소리는 단순히 어떠한 언어로서의 단어만이 아니다. 매 순간의 욕구나 의지 또는 문제해결을 위한 전략이 숨겨진 복합적인 결과로써의 단어이며 그 속에는 수많은 감정과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유명한 언어학자 촘스키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단어의 의미는 접근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영역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에 접근하는 것은 아마 영원한 숙제로 남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영원히 ‘할~’로 남아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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