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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1. 2023

울 할매 유머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나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얘기가 긴가민가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는 내가 똑같은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 


  그렇다. 수청무어(水淸無魚)는 사람이 너무 결백하고 엄격하면 친구마저 다 떨어지니 세상만사에 너그러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개 머리가 좋고 앞뒤가 분명한 사람일수록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쌀쌀한 냉기가 돌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투명한 물처럼 살면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법이다. 가끔은 내 스스로 허물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나타내야 사람이 붙는다. 이런 이치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려 봐도 꼭 맞는 말이다. 


  할머니는 생전에 아주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이대 독자로 아들 하나를 낳고 할아버지가 서른셋에 갑자기 돌아가신 뒤부터 거의 입을 닫고 사셨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고요한 분이셨지만 위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계셨고 평생 청상과부로 사셨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맑고 고요한 물 같은 그런 할머니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평생 얼어붙은 것 같은 할머니한테도 나를 배꼽 잡게 하는 유머가 있었다. 


  한 번은 생신을 맞아 금반지를 하나 해드렸는데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얼굴은 활짝 웃으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손을 이마 위로 자꾸 올리시는 거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자랑하고 싶으셨던 거다. 그 후 우리 손자 손녀들은 할머니를 골려 먹느라고 오늘은 머리 안 아프냐고 하면 할머니는 고이 춤에 감춰둔 반지를 얼른 끼고는 주저 없이 머리에 손을 얹고는 했다.


  할머니의 유머는 또 하나 있다. 작고 조그만 체구에 비린 것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는데 유독 돼지족발을 끓인 뽀얀 국물을 좋아하셨다. 비싸지도 않은 거라 가끔 사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날도 단골로 가던 정육점에 들러 고기를 사는 김에 돼지족을 서너 개 달라고 했다. 정육점에서는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며 돈도 받지 않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덤으로 건넸다. 돼지족을 가져왔다는 말에 할머니가 얼른 일어나 신문지를 펴보더니 한마디 하셨다.

   “기왕이면 한 켤레는 사 와야지 한 짝이 뭐냐. 짚신도 다 짝이 있다잖아” 


  식구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도 그때 왜 할머니의 주름진 손가락에 끼었던 금반지가 생각났는지 모른다. 평생 짝 잃은 기러기처럼 사셨는데 기왕이면 쌍가락지를 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구십 가까이 홀로 사시던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식구들을 웃기고 나서 그해 여름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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