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Jul 31. 2023

감자전

  텃밭 옆집에 나보다 한해 먼저 들어와 노후를 보내고 있는 이웃이 있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귀촌하신 분인데 내가 형님이라고 부른다. 주말에 인사차 들르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 나온다.


  농사일은 둘 다 초보라서 서로 궁금한 것이 참 많다. 형님이 작년에는 텃밭에 고추를 잔뜩 심었는데 탄저병 때문에 따보기도 전에 몽땅 뽑아냈다고 한다. 금년에는 그 자리에 고추는 보기도 싫고 감자나 심는다고 한다. 


  감자농사도 만만치는 않다. 나도 재작년 봄에 강원도에 다녀온 친구가 최고로 맛있는 감자를 샀다고 자랑하면서 먹다 남은 게 반 박스나 되니 심어보라고 했다. 하도 호들갑을 떨기에 그것을 죄다 쪼개 심어봤다. 늦게 심어 싹이나 날까 했는데 풀과 경쟁하면서도 줄기에 잎이 달리더니 심지어 감자 꽃까지 피는 게 대견했다. 하지만 웬걸 감자를 캐보니 대부분 쭉정이에 콩알 만 한 것만 달려있다. 어쩌다 작은 돌멩이 만 한 것도 나왔는데 여지없이 굼벵이가 파먹은 것이 꼭 못난 초보농사꾼인 나를 닮았다. 그 뒤로 나는 감자 심는 걸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들어본 풍월과 내 경험담을 섞어 그 형님한테 감자는 씨감자가 따로 있으니 그걸 심어야 한다고 했다. 또 감자를 심기 전에 퇴비도 잘 넣어주고 흙도 완전히 소독해야 한다고 했다. 그 형님도 나처럼 제초제나 농약 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할 줄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형님은 우리 마당에 와 머위 삶을 때 나온 나무 재를 얻어갔다. 그걸 씨감자에 묻혀 비닐을 씌운 고랑마다 박는다고 한다.


  한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가 다가오던 주말 저녁이었다. 손자 손녀들이 텃밭에 있는 초록집에 놀러 와 재잘거리는 데 옆집 형님이 불쑥 마당으로 들어온다. 두 손으로 받쳐 든 커다란 양푼에 햇감자가 가득 담겨있다. 방금 캤다면서 맛이나 보라고 한다. 땀자국이 난 주름진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아이들도 감자를 하나씩 들고 요것이 진짜 저기 밭에서 나온 것이냐면서 신기해한다.


  아내는 나더러 감자전을 부쳐보라고 한다. 부침개는 텃밭에서 내가 제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다. 햇감자는 칼로 다듬을 필요도 없다. 숟가락으로 대충 긁으면 뽀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큼직한 바가지에 강판을 대고 감자를 문지르면 아삭한 소리와 함께 싱그러운 즙이 흥건하게 나온다. 화단 옆에서 부추 한주먹을 베다 쫑쫑 썰어 넣고 청계 알 두어 개와 부침가루를 넣고 잘 저으면 준비는 끝이다. 소금을 칠 필요도 없다. 불만 잘 조절하면 된다.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만든 부침개가 최고라며 서로 먼저 먹겠다고 난리법석이다. 뒤집다 실패한 못난이 한 조각을 입에 넣어보니 역시 상쾌한 감자 향이 기막히다. 그런데 한 녀석이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노려본다. 왜 그러냐고 하니 이걸 다 먹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막냇동생 때문에 오늘 엄마가 못 왔는데 요걸 갖다 주어야 한다고 눈물까지 쏟아낸다.


  순간 씨도둑은 못한다며 생전에 어머니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내외가 맞벌이 때문에 아이들을 시골집에 잠시 맡겼을 때 얘기다. 잔칫집에 데리고 갔는데 그 쪼그만 녀석이 배가 고팠을 텐데도 입을 딱 닫고 있었다. 아무리 달래도 노려보고 있더니 할머니 귀에 대고 그랬단다. 아빠랑 엄마 갖다 주게 싸달라고. 어머니는 지 애비를 닮아서 아주 흉악한 놈이라며 웃으셨다. 나도 어렸을 때 그랬을까.   


  아주 뽀얗고 예쁜 감자만 골라 부침개를 더 부쳤다. 아내가 노릇하고 모양이 잘생긴 감자전을 밀폐용기에 담았다. 큰 손녀는 집에 갈 시간이 멀었는데도 벌써부터 감자전 봉지를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다. 둘째 손녀는 자기가 들고 간다며 언니한테 소리를 지른다. 결국 둘이 서로 싸우다 나를 보더니 갑자기 동시에 울음보를 터뜨린다. 


  아이들 눈에는 호수가 숨어있나 보다. 어디서 그렇게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울거나 말거나 그날 저녁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달달하였다. 


이전 10화 할 또는 할머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