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Aug 22. 2023

백화원에 피는 꽃

  늘그막에 채소나 기르며 노후를 보내려고 세종시와 공주시가 만나는 곳에 조그만 텃밭을 마련하였다. 처음 몇 해는 욕심껏 온갖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지어보았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농약을 치는 것은 물론 모든 게 서툴다 보니 아예 농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그래 입으로 들어가야만 맛이더냐 눈으로 먹은 것도 좋으리’ 싶어 결국 농사일을 줄이고 정원으로 바꿨다. 


  결국 텃밭은 집터 아래쪽으로 채소 심을 데만 남겨놓고 전부 나무와 꽃을 심으면서 조금씩 정원으로 바꿔갔다. 하지만 정원이래 봤자 근처에 있던 나무며 들꽃을 옮긴 것이 대부분이고 아는 사람들이 가져온 묘목이나 꽃씨를 뿌려 놓은 것이 전부다. 그래도 봄이 슬금슬금 다가오면 무슨 꽃이 피나 싶어 기다려진다. 


  우리 집 정원에서 가장 먼저 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은 역시 산수유와 홍매화다. 둘은 노랑 병아리 떼 같은 꽃망울과 고혹적인 선홍색 꽃망울을 앞다투며 터트린다. 바람이라도 살살거리면 시선을 사로잡기로는 천연기념물이라는 미선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새하얀 작은 꽃이 쌀알처럼 붙어있는 정겨운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 향기가 아찔하다. 


  고향 집에서 가져온 진달래와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봉황산이 잘 보이는 앞뜰에는 명자꽃도 만발한다. 가시가 있는 가지에 작고 소박한 붉은 꽃이 장미처럼 피는 명자는 아예 성품이나 이름까지도 아내와 똑같다. 텃밭 입구에서 보라색 각시붓꽃 너머로 명자꽃을 보았다면 이미 정원 안주인을 마주한 것이다.


  할미꽃이 고개를 숙이고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하면 봄이 익었다는 신호다. 첫애를 가진 며느리가 한겨울에 꼭 앵두를 먹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심었는데 지금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상큼한 맛까지 한 움큼씩 선물한다. 이때부터 한여름까지는 온통 동네방네 꽃 잔치가 열린다. 


  황매화는 물론이고 원추리나 제비꽃 위로 소담스러운 산수국이 몽실거린다. 민들레, 채송화, 맨드라미나 나팔꽃, 어렸을 적 시골집에 피던 정다운 꽃들은 물론이고 은방울꽃, 매발톱꽃, 란타냐처럼 꽃집에서 이사 온 녀석들도 함께 어울려 잔치를 벌인다. 꽃이 피는 나무들은 모두 열매를 맺기 마련인데 연분홍 모과꽃이 그토록 은은하면서도 소박한 매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모과꽃이 봉긋하게 솟아오르면 못난 그리움이 마구 두근거린다. 


  초여름이 되면 나무로 지은 초록집 계단 앞 아치에 덩굴장미가 흐드러지게 핀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장미꽃그늘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지 않으면 못 견딜 만하다. 한여름에 피는 자귀나무꽃도 아름답다. 흰 바탕에 분홍색 술을 가득 매단 꽃에서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경대 서랍 분갑에서 나던 향기가 난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잎들이 서로 다정하게 포개지기 때문에 이걸 심으면 부부금슬이 깊어진다고 한다.


  가을로 접어들어도 꽃들의 잔치는 계속된다. 능소화가 줄기를 따라 아직도 자태를 뽐내고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이 바람에 손짓하면 하얀 부추꽃도 덩달아 핀다. 할머니를 떠올리는 부추꽃이야말로 우리 집 정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다. 백합화나 나리꽃이 지고 구절초가 피어날 때 제일 늦게 황금색으로 감국이 꽃망울을 일제히 터뜨린다. 감국은 첫눈이 올 때까지도 절개를 지키며 단정한 모습을 흐트러지지 않고 정원을 지킨다. 더구나 한 겨울에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감국차의 그윽한 향기는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녹이고도 남는다.


  사실 나는 정원에 심은 나무 중에서 배롱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매끄러운 나뭇가지의 자태도 일품이려니와 백일홍이란 이름같이 오랫동안 의연히 피는 꽃이 선비의 품격을 닮아서다. 내가 배롱나무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친구 하나가 기어이 보내준다기에 기왕에 선물하려면 꼭 다섯 그루를 보내라고 하였다. 손녀 손자가 다섯이니 각자 이름표를 달아줄 셈이었다. 이렇게 시작해서 꽃과 나무에 꽃말까지 적은 이름표를 달다 보니 벌써 백 가지도 넘는다.


  꽃샘추위가 시샘하던 지난 토요일에 처가 식구들이 텃밭 정원을 찾아왔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모란이며 라일락과 산철쭉이 봉긋하게 움트는 모습을 보면서 꽃나무가 몇 가지나 되냐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이름표를 달다 보니 백 개도 넘는다고 했더니 여기가 바로 백화원이란다. 


  손자 손녀가 다섯이다. 똑똑한 데다 마음씨까지 고운 첫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 자기가 예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욕심쟁이 셋째, 아니야를 연발하며 뒷짐 지고 토라지는 고집쟁이 넷째, 보석처럼 빛나는 꼬마 왕자 다섯째.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자신만의 향기가 독특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이다. 


  백 가지가 넘는 꽃이 핀다 해도 사시사철 우리 집 정원 백화원에 피는 진정한 꽃은 이 다섯 송이다.


이전 12화 초록집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