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Aug 23. 2023

뜨거워서 좋을 것

  막 걷기 시작한 손자 녀석이 입을 딱 벌리면서 빨리 고기를 달라고 달려온다. 불판에서 고기 한 점을 얼른 집어 입에 넣어 주었는데 냅다 뱉어버린다. 그다지 뜨겁지 않았는데 손자 녀석은 뻘건 숯불이라도 집어넣은 듯 화들짝 놀라며 내 등짝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뜨거운 것만 생각하면 처음 유럽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안개 낀 겨울 아침의 런던 거리는 뼈가 시리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호텔 커피숍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데 일행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달라고 했다. 덩치가 곰만 한 종업원이 뭐라고 씨부리는 데 잘 들리지도 않고 그래서 무조건 오케이 땡큐를 했던 것이 탈이었다. 한 참 만에 가져온 것을 보니 커피랍시고 무슨 아이들 소꿉장난하듯 쪼끄만 잔에 담아 왔다.


  아니 영국이 한때 해가 떨어지지 않는 나라라고 하더니 이렇게 큰 호텔에서 그것도 덩치도 커다란 놈이 거피랍시고 주는 게 참 인심도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에스프레소가 뭔지 구경 못 한 촌놈의 당연한 오해였다. 불상사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작은 잔을 깐보고 덥석 목구멍에 털어 넣은 것이다. 순간 불덩이같이 뜨거운 감이 느껴졌다. 점잖은 자리에서 품어 뱉을 수도 없고 억지로 삼키자 입천장이 다 벗겨지고 눈물까지 쑥 빠졌다. 그 후로 사십 년 넘은 지금까지도 에스프레소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아침에 국이 있어야 밥을 먹으니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된장국이든 미역국이든 펄펄 끓는 것을 먹어야 개운한 것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아예 타고난 것 같다. 또한 출장이라도 가서 집 밖에서 아침을 먹게 되면 으레 해장국집부터 찾는다. 뜨거운 뚝배기에 담긴 탕을 골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펄펄 끓는 콩나물국에 날계란이라도 한 개 넣어 먹어야 아침을 먹은 것 같다.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목욕탕에서도 마찬가지다. 살갗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서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나 역시 평생 유성온천 근처에서 살았으니 계절과 관계없이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자신의 체온보다 조금만 뜨거워도 단번에 뛰쳐나온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천에 갈 때마다 몇 번을 얼러보아도 뜨거운 탕에는 한 번도 데리고 들어가지 못했다. 


  나이가 드니 아이한테도 배울 점이 많다. 우선 먹는 것부터 그렇다. 아이처럼 먹는다면 늙어서도 크게 고생하지 않을 듯싶다. 음식을 먹을 때도 쓰든지 달든지, 목구멍이 타들어 가든지 말든지 입에 넣으면 무조건 삼키고 보는 데 아이는 조금만 이상해도 본능적으로 뱉어버린다.


  또 아이들을 보면 국에 말은 밥알이 불어 터질 때까지 놀면서 천천히 먹다가도 적당히 배가 차면 본능적으로 입을 닫아버린다. 먹다 남긴 고기 한 점이 아까워서 한 개만 더 먹으라고 쫓아다녀 보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목욕시켜 봐도 그렇다. 조금만 뜨거워도 아예 발가벗은 채 문밖으로 냅다 도망을 치고 만다. 음식이고 목욕이고 뜨겁게 해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사시사철 뜨거운 나라에서 인류 문명이 꽃피웠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뜨겁게 할 것은 사랑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전 07화 아버지가 바른 빨간 매니큐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