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너머

제주의 이미지를 걷어냈을 때

by 한혜경

"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



일상에 찌들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면 머릿속을 맴도는 노래이다.

푸른 밤하늘과 바다, 우리를 얽매는 것들로부터 벗어난 삶,

복잡한 도시를 떠나 금귤 밭과 감귤밭을 일구며 사는 소박한 삶......

제주도는 청량한 푸른 이미지로 우리에게 손짓한다.


푸른 바다 이미지.jpg


하지만 어느 해인가 그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졌다.

2월 말의 남녘엔 봄내음이 물씬하겠거니 했는데,

웬걸, 쌀쌀한 바람이 사정없이 옷깃을 파고들고 바다의 물결은 포효하듯 날뛰고 있었다.

푸름이 아니라 사납고 거칠고 스산했다.

그동안 날씨가 좋을 때만 왔던 것이다.




기당 미술관, 변시지 화백의 그림 앞에서 그 기억이 떠올랐다.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난 변화백은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1957년 귀국해 서울에서 활동한다.

1975년 고향으로 돌아와 2013년 작고하기까지 제주 풍광을 그렸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 제주의 푸른 바다는 없다.

제주의 유채꽃밭도, 동백꽃도 없다.

언덕 위 한편에 초가집 하나 쓸쓸히 서 있고, 그 옆에 소나무 한두 그루, 지팡이를 짚고 있는 구부정한 사내와 조랑말, 그리고 가끔 새 한 마리가 전부이다.

그리고 배경이 바다든 폭포든 모두 황톳빛이다.

푸른 바다와 노란 유채꽃밭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낯설 뿐 아니라 황량하기까지 하다.


그중, [기다림]이란 그림이 유독 시선을 붙잡는다.


변시지 기다림.jpeg 변시지의 그림 [기다림]


아득한 바다 끝에 돛단배 하나 떠 있고, 폭풍이 불기 전일까 하늘은 검은빛으로 불안정하게 출렁이는데,

초가집은 비스듬히 기울어 있어 위태로워 보인다.

그 앞에 가느다란 소나무 세 그루, 덥수룩한 머리의 사내는 지팡이를 짚고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길래 저런 자세로 서 있는 걸까?


얼핏 체념한 것처럼도 보이고, 회한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한데,

그 어떤 감정도 내면 깊숙이 감추고 그 안에 똬리를 튼 채 침묵하고 있는 듯하다.

보는 사람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는다.


인상적인 점은 다른 그림들에서도 사내의 자세는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거나 바람이 불거나,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심지어 초가집을 허물듯 파도가 솟구쳐 오르고 나무가 휠 정도로 폭풍이 몰아치는 중에도

같은 자세로 바람을 맞고 있다.


그림을 뚫고 나올 듯 폭풍의 위력이 압도적인데 피하지 않고 바람 속에 있는 모습은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평화롭고 안온한 것만이 아니라 거센 바람으로 표현되는 척박한 환경,

그리고 변덕스러운 삶의 속성까지 모두.


어떤 상황이든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면 헛된 욕망이나 정념에 휘둘릴 일도 없을 터.

그러고 보니 그의 모습은 체념이나 슬픔이 아니라

텅 빈 마음에서 비롯되는 평안과 겸양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인간이 최고라는 오만과 거리가 먼,

조랑말과 새들과 함께 살아가며 험악한 환경도 불평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

그래서 적막해 보이지만 충만한 삶.

그 속에서 황톳빛은 쓸쓸한 색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생명의 색으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