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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Sep 09. 2023

'퇴사'에서 '반퇴'로(100세시대 사는법)

반퇴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모든 직장인들의 꿈,

사.직.


나 역시 그랬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를 스스로 정리하기 전까지는.


일단 남의 강요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나의 필요'에 의해 회사 다니는 거라고 정리하고 나니, 모든 것이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출근길 지옥철은 여전히 숨쉬기 어려웠지만 예전처럼 내 신세가 서럽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틈만 나면 남편이나 동료들에게 회사욕, 상사욕을 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던 버릇도 없어졌다. 퇴사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동료에게는, 그러지말고 힘내라고 말해줄 여유마저 생겼다.


ㅇㅇ씨, 표정 관리 좀 해요.


예전에 동료가 해준 말이다. 그 때 나는 얼마나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걸까? 그 누구도 나에게 불행한 직장인으로 살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지금도 그렇다. 힘든 계약직 시절 이겨내고 정규직이 되었고, 회사 일도 그렇게 싫지는 않다. '파이어족'을 미화하고 직장인을 '월급노예' 취급하는 시류에 휩쓸려 공연히 '불행한 직장인'을 자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 이왕 다니기로 한 회사, 즐겁게 다니자


회사생활은 여전히 만만치 않고 상황은 변한 것이 없으나, 마음가짐이 바뀌니 출근길이 한결 가벼워졌다. 얼마 전에는, 정년 꽉 채우는 것을 넘어서 죽을 때까지 일하자,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주변인들의 영향 덕분이었다.




# 직장동료 40대 회사원 박 모씨

점심을 먹던 중, 요즘 아이들 사교육비 대느라 '퇴사'는 물건너 간것 같다고 말하니 깜짝 놀라며 묻는다.

 

모아놓은 돈 많아요? 100세 시대에 평생 일해야지, 무슨 퇴사야~


물론 모아놓은 돈이 있을리 없다, 집 한 채 외에는. 동료의 팩폭에 민망해진 나는, 집에 돌아와 나와 남편의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을 대충 계산해보았다.


ㅇ 남편 : 국민연금 21년 납부, 개인연금 3건

ㅇ 나 : 국민연금 15년 납부,  개인연금 1건


매월 받게 되는 연금액을 계산해보니, 남편 55세부터 월 50만씩 받다가, 우리 부부가 65세 이르러서야 매월 현재 소득의 28%를 받게 된다. 그것도 둘다 정년까지 꽉 채웠을 경우이다. 굶지는 않겠지만,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 이제부터라도 월급 외 파이프라인을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불로소득으로는 월 100만원 벌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꿈에 그리는 삼성전자 1만주 모아봐야 월 배당금이 120만원 남짓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소득으로 월 200만원이라도 번다면, 노후대비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수 있지 않을까?


정기적이고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보통 그 액수의 100배 규모 자산의 힘과 같다.  <돈의 속성>

월급 250만원은 7억원의 상가나 꼬마빌딩을 보유한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료가 매달 4퍼센트, 250만원 가량 되기 때문이다. <딸아, 돈 공부 절대 미루지 마라>


...그래도 그렇지, 평생 일을 한다고?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노후의 모습이었다. 그 동료는 남편이 의사라서 굳이 맞벌이를 안해도 가계소득이 평균 이상일텐데, 여태까지 육아휴직 한번을 안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었나…그러고보니 입사 이후 이 부서 저 부서 기웃거린 우리들과는 달리, 줄곧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꾸준히 쌓아온 독보적인 경력의 보유자이다. 혹시 이런 장기적인 플랜 하에서 한 분야만 파고든 것이 아닌지. 평생 일하려면 아무래도 전문성이 있어야 할테니 말이다.




# 대학선배 50대 전업주부 정 모씨

선배 언니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벌써 10여 년 전 일이다. 남편이 미국 기업에 취업을 한 것이다. 이제 아이들 대학 다 보내고 세계 유수 기업의 임원 싸모님으로서 커다란 저택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고 있는 언니는 매일 브런치 플레이팅 사진이나 포틀럭(potluck) 파티 사진, 필라테스 및 PT 트레이닝 사진, 하이킹 및 등산 사진 등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다. 내 주변에서 가장 팔자가 좋은 여인네가 아닐까, 부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언니 인스타에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사진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제품 포장 같은 일종의 가내수공업(?) 일이었다.

 

언니, 요즘 일해? 임원 싸모님이 무슨 일이야?

집에만 있으니 무료하고 빨리 늙는 것 같아서...물가도 너무 올라 기름값이라도 벌려고


언니에 따르면, 요즘 미국에서는 퇴직 후 아예 일을 그만두기보다는, 하루에 몇시간이라도 일을 해서 루틴과 활력을 지키면서 용돈벌이를 하고, 남는 시간에 개인생활을 갖는 '반퇴(半退, semi retirement)'가 유행이라고 한다. 수입이 너무 많으면 연금이 중단되기 때문에 일을 더 하고 싶어도 못하고, 연간 정해진 수입 한도 내에서만 정해놓고 한다고.


반퇴한 한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직장이 어딘줄 알아?

급여 외 복지가 좋은 "코스트코"야.ㅎㅎ

우리 부부도 계속 일하면서 그렇게 반퇴로 살기로 했어.


이상적인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던 언니가 일을 시작하다니, 그것도 50대에...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로서는 갑자기 롤모델을 잃은 기분이었다.


언니가 이제 일을 시작하면, 나는 어쩌라고.




사실 파이어족은 '금전적'인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갖는 중력의 힘, 돈이 돈을 버는 속도, 복리의 마법 등을 고려할 때, 초반에 극도의 절약과 저축을 통해 종자돈을 마련하고 그 투자 수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매우 효율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어디 그런가? 젊을 때 아무리 운동을 많이 했어도, 나이 들어 안 움직이면 바로 망가지는 게 인간의 몸이다. 아침에 좋은 음식 많이 먹어두었어도 저녁이 되면 또 먹어주어야 하고, 어릴 때 공부를 많이 했어도 평생 갈고 닦지 않으면 못쓰는 지식이 되고 만다. ''이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평생 우리 생활에 적절한 긴장감과 활력을 제공해주는 원동력은 아닌지.


그러니까 일을 한다는 것은 생계를 해결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내 인생의 시간을 잘 보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은퇴 같은 퇴직'을 하고 평생 공부하며 학생으로 살겠다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결국 다시 일터로 나오게 된 것도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에 쓰여 보탬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고요. -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얼마 전에 눈길을 끈 기사도 있었다.


...명동의 한 약국에서 만난 김 모(80) 씨. 47년째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에게 언제까지 일할 계획이냐고 묻자 "앞으로 5년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세무사로 일하고 있는 이 모(72) 씨는 “정년이 65세라고 해도 남은 노년기가 20년인데 집에만 있기엔 상당히 길다”며 “아직 내 일이 있으니 이 나이에도 매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어 좋다...일상에 활력이 돈다”고 말했다. 70~80대에도 은퇴하지 않고 활발하게 일을 하는 전문직 ‘불퇴족(은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1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인구 중 취업자 비율을 뜻하는 고용률은 36%로 2018년부터 매년 최고치를 경신했다. - 2023.9.1. 조선비즈 은퇴 없이 일하는 7080 전문직 불퇴족들... “일하는 보람 못 놔요” - 조선비즈 (chosun.com)




그리하여, 사직과 파이어족을 꿈꾸던 나는 180도 방향을 선회하여 정년퇴직 후에도 평생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평생 일할 몸을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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