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계약직 설움을 버틴 이유
경솔한 퇴사로 인해 한번 쓴 맛을 본 나는, 재취업한 회사에서 내 발로 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회사 일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져올 때면 당장 그만둬야겠다고 주변 사람들(특히 남편)에게 하소연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만둬. 절대 못 그만둬...어떻게 들어왔는데.
운좋게 들어간 첫 직장을 냉큼 그만두고 후회한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심지어 그 회사 근처라도 지나갈 때면 우울증이 도져 일부러 빙~ 돌아서 지나가야 했다. 다시는 내가 가진 것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믿었던 상사가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대놓고 차별을 해도, 똑같은 일을 하면서 특별한 취급을 받는 정규직들 볼 때에도, 나와 띠동갑인 어린 정규직이 싸가지 없이 굴어도...무시하며 버티는 수밖에.
계약직이라도 일은 열심히 했다. 자존심이 있으니까. 종종 있는 새벽근무나 야근을 할 때에는 '나는 감정이 없는 기계다~' 하면서 견뎌냈고, 가끔 일에 과하게 몰두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를 자제시켰다.
뭘 그리 열심히 해.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더구나 계약직인데...워워~
그렇게 10여년을 버텼다. 점심시간마다 심리상담, 요가, 필라테스, 헬스, 물리치료 등 나를 힐링시켜 줄만한 것들을 전전하면서.
그러는 동안에, 꿈에도 그리던 정.규.직.이 되었다. 생각지도 않게 승진도 하여 이제는 나를 무시하던 그들과 별다를 바 없게 되었다. 내가 올라간 건지, 그들이 내려온 건지 몰라도...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동등한 신분이 된 것이다.
나는 재취업한 회사를 왜 그만둘 수 없었는가?
첫째, 경제적인 이유이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의 힘.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간 육아휴직하고 남편 월급만으로 살아본 적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늘어가는 식비와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달 카드값을 제하고 통장잔고가 텅 비면, 내 마음도 텅 비는 것 같았다.
재작년 '파이어족' 열풍이 불 때에는 파이어족이 쓴 책은 다 찾아서 읽으며 퇴사를 동경하기도 했지만, 막상 퇴사하고 '무엇을 해서 월급만큼 돈을 벌지?'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초중학생 가르치는 일이 제일 만만한데, 과외를 해서 월급만큼 벌려면 도대체 몇명을 가르쳐야 하나~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무엇보다 요즘은 입시가 우리 때와 완전 다르고 선행도 빨라져, SKY 출신이라고 해도 초중학생 가르치는 일이 절대 만만치 않다.
둘째, 자존감 때문이다. 일 욕심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일이라도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첫 직장 그만두고 여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도움되는 건 없어도) 든든한 빽이 있어 좋았는데, 갑자기 그 빽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한번은 육아휴직 중에 초딩아이 엄마들 브런치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이야기 하다보니, 다들 왜이리 살림도 야무지게 잘하고, 남편도 다 의사, 판검사, 변호사, 파일럿 등 고소득 직업에, 고급주복아파트에서 멋지게 꾸며놓고 잘들 사는지...세상에 부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듯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살림도 못하는데다가, 박봉으로 쪼들리는 형편에, 집 인테리어는커녕 내 한 몸 가꿀 여유도 없는 초라한 신세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몇 달 뒤 회사에 복직한 후에 똑같은 엄마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자격지심은커녕 알 수 없는 당당함, 자신감이 샘솟는 것이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요즘 ㅇㅇ 회사 복직해서 다니고 있어요.
이 한마디에 엄마들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고, 나는 속으로 '내가 이겼구나~' 감지할 수 있었다.
셋째,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하루종일 하고 싶은 건 스벅에서 책 읽고 글쓰는 일(지금 하고 있는...)인데, 이를 잘하려면 '재정적 안전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 대신 동네 산책을 하고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카페에서 글을 쓰는 프리랜서의 삶'...만 상상하면서 금전적 준비없이 퇴사를 했다가는, 카페에서 내가 원하는 글을 쓰는 대신 돈 벌 궁리나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재정적 안전감(fiancial safety)
- '한번 실패한다고 해도 내 인생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마지노선
- '안정감(stability)'이 큰 변화없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정적인 개념이라면, '안전감(safety)'은 한번 실패해도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해볼수 있게 해주는 동적인 개념
- 가장 쉽게 안전감을 확보하는 방법은 월급을 받는 것이다.
출처: 박소연 <딸아, 돈공부해야 한다 >
박소연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매달 규칙적인 수입이 있다는 것은 자산 관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일정하게 유지되는 현금 흐름은 현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뿐 아니라, 미래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가뜩이나 불확실한 내 인생에 월수입마저 불확실해 진다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월급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이번달은 이렇게 보내자' 계획을 세워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나는 매달 월급 따박따박 주는 이 회사를, 정년을 꽉 채워 나가라고 할 때까지 다니기로 했다.
여전히 브런치에서 '퇴사'가 들어가는 제목의 글을 자동 클릭하긴 하지만, 그건 남편과 더 없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서도 '돌싱글즈'를 즐겨보는 것과 똑같은 심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