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그곳은 누드존이었다.
토요일 아침 늑장을 부리며 주말을 즐겼다. 커피를 사는 여유도 즐겼다.
독일 국민 마트 네토에 들려 냉동 커피 두개를 샀다. 아이와 함께 계산대를 기다리는 어머니께서는 내 손에
들린 2개의 커피를 보고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Danke schön! (고마워), Bitte schön (천만에) 으로 시작하는 하루. 시작이 좋다.
계산을 마치니 웃는 얼굴로 굿바이를 외쳐주셨다. 독일어는 모르지만 확실히 좋은 주말 보내세요~
라는 뜻 같았다. 집으로 들어와 얼음을 넣은 커피를 즐겼다.
딱 한국의 삼각 커피맛이다.
이번주는 올덴부르크의 몇 안되는 날씨 좋은 날이다.
나와 율리우스는 오늘 옆 동네 Bad Zwischenahnd의 호수를 가기로 결정했다.
테라스를 청소하고 나서 바로 호수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곳곳도 보고, 스포츠 용품점에 들려 배드민턴 채도 샀다.
이제 호수로 이동, 자전거로 가니 역시 올덴부르크가 색다르게 보인다.
5개월 넘게 살면서 올덴부르크는 한편으로는 도시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나 말이 보이는 깡촌마을 같게 매력이다. 작은 말들, 뙤약볕을 가로지르는 나, 간간히 모래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간지러웠다.
마침내 자전거를 즐기는 무리들을 지나치자 호수가 보였다.
-아니, 이렇게 좋은 데를 이제서야 왔다니 !
많은 사람들이 태양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의 무리를 통과해 한적한 곳을 찾자며 깊숙히 들어갔다.
나는 율리우스와 이런 저런 장난을 치면서 길을 걸었다.
그런데 눈을 의심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저씨들이 무언가 이상했다.
뭐랄까. 아래쪽이 덜렁거라며 걸어오시는게 아닌가.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나체의 아저씨들과이 거리를 좁혔다.
가장 가까이 걷고 있던 아저씨는 잔디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셨다.
"앗, 내가 오는게 부끄러우셨나? 여기 내가 들어와도 되는 곳이 맞나? "
부끄러워 피하신 줄 알았던 아저씨는 이내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그의 쭈그려 앉는 모양새는 숨으신 게 아닌 용변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Dicks (남성의 성기) 들을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율리우스에게 여기 걸을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거 아니야? 물었다.
그도 여기가 누드존이라는 것을 몰랐다.
Um... But we don't have to take off clothes. (하지만 우리가 옷을 벗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계속해서 길을 걸으니 남자들 뿐만 아니라 나체의 여자들도 보였다.
주로 젊은 사람들은 커플끼리 왔고, 아저씨들은 혼자만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나체 무리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돗자리를 폈다.
가져온 와인과 새우깡을 뜯으며 우리는 누드존에 대해 이야기 했다.
율리우스는 들어오며 Kein (독일어로 No 라는 뜻) 이라고 쓰여진 표지판봤는데 나중에도 Kein이 빠져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옷을 벗어도 되는 누드존을 의미했을 것이다.
유럽 남자 율리우스에게는 누드존이 익숙했겠지만 나에겐 꽤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전혀 모르고 와서 받은 Impression (인상) 이라 그런지 더욱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율리우스는 우리도 다음엔 누드로 올래? 라고 했다.
누드 체험(?)을 해보는게 꽤나 유의미한 경험일 것 같았지만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아는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해? 였다. 우리는 서로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했다. 그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친구, 교수님, 율리우스와 일하는 교직원 등등...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 가서 해보자는 결론을 내리며 키득거렸다.
그는 한국에는 누드존이 없는지 궁금해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국에 누드존이 생긴다면... 생기기 전 부터 온라인은 난리가 날테며 반대 VS 찬성 두 갈래로 나뉘여 시위까지 발생할 지도 모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국에 있을 때 학원 근처에서 본 퀴어축제가 생각났다. 좁디 좁은 자리를 실랑이 끝에 겨우 얻었는지 차선의 한쪽은 펜스가 쳐져 있었고 한쪽은 여전히 차가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무지개 옷을 입은 사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반대쪽 광장에서는 반대 시위와 목사님의 연설로 시끌시끌했다. 참 아이러니하게 축제라는 이름은 단 단체는 도로 모퉁이에 있고 반대 단체는 큰 광장을 차지하고 있는게 누가 봐도 환영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경찰들은 싸움이 일어날까 곳곳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LGBTQ에 대한 아무런 의견이 없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축제라는 이름을 붙인 단체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라면 왜 이 축제가 도심 한복판에 이뤄지게 뒀는지, 누굴 위한 것인지, 본질을 찾을 수 없는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자유를 침해하고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지 생각했다. 축제를 시위로 만들어버린 이 상황을 목격했다는 것이 불쾌했다. 성별에 민감한 건 그만큼 성 인식이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퀴어축제 크리스토퍼 스트릿 데이 일명 CSD 데이가 있다. 정치, 종교, 성별, 인종, 국적, 문화, 연령, 직업 등 구분없이 그 자체가 축제다. 무지개 옷을 입고 온통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고선 이게 뭔가 싶었다.
당시 함부르크 기차역이 무지개와 하와이안 옷을 입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그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기차에 탑승했다. 독일 친구에게 오늘이 무슨 독일 기념일이냐고 물어보니 퀴어 축제고, 지역마다 열리는 시기가 달라서 올덴부르크는 다음달에 개최된다고 했다. 친구는 나에게 그날 놀러가자! 라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불쾌함을 느꼈던 나와 달리 독일 친구에게 퀴어는 즐거운 축제날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독일인이 부럽다고 느꼈다.
사실 난 일명 국뽕으로 가득 차 있는 교환학생이었다. 누군가 한국에 대해 물어보면 자신있게 설명하고
K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는 위풍당당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달랐다.
LGBTQ에 대해 아무 관심 없는 내가 왜 한국 퀴어 축제에 불쾌함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서로를 인정하면 되는 분위기를 상실했다.
Wir sind alle Menschen.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라는 팻말을 보았다.
남녀, 이성애, 동성애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면 우리 모두가 느끼는 그 불쾌함이 해소될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지향하는 가치가 맞다고 강요하는 실랑이가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부러웠다.
독일의 퀴어는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노력이 멋져 보인 "축제"였다.
중요한 건 논리가 아닌 포용임을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안 그런 나라가 어디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당연한 것처럼 치부해왔다.
환영식 때 만난 카메룬 교환학생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한국 드라마 진짜 너무 사랑해. 그래서 너네 나라 문화도 잘 알고.
그래서 궁금한건데 한국여자들은 진짜 4B 해? "
"그게 뭔데? "
"그러니까 한국은 젠더갈등도 극심하고 남녀 차별도 심해서 여자들이 성관계, 출산, 데이트, 결혼 자체를 안한다 하더라고"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기분이 나빴었다. 당시 난 4B라는 단어도 처음 들어 봤고 뭘 모르는 외국인이
한국을 비난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4B운동을 검색해보니,
2019년 한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 신념은 성관계 금지(no sex), 출산 금지(no childbirth), 데이트 금지(no dating), 남성과의 결혼 금지(no marriage with men)라는 4가지 "금지(no)" 규칙이다.
라고 네이버 백과사전에 명시가 되어있는 이론이다. 흑인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국 여성처럼 4B를 시행하자! 라는 운동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응 중에서는 한국인인데 이거 한국에서 아는사람 없을 정도로 과장된거다, 한국의 저출산은 페미니즘때문이 아니라 경제문제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모르기 보다는 인정하기 싫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나와 율리우스가 누드존에서 한창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작은 여자 아이가 지나갔다.
" 저 여자 아이도 오면서 누드인 사람 다 봤겠다 "
"근데 나는 그거 되게 좋은 교육인 것 같아. 몸이라는 걸 성적으로 보지 않고 이상하지 않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거잖아. 오늘 느꼈는데 왜 사람들이 유럽을 동경하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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