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의 시간은 삶을 더 값어치 있게 만들어 준다.
어울리지 않음을 극복하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게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0월의 나는 곧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스스로 이 문장을 되새겼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한 학기 연장을 결심하고 3개월 정도는 우울했고 또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돌이켜 보면 그 과정 전부가 교환학생으로 짧게 놀다 떠나는 이방인이 아닌 뿌리를 내리고 독일에 살아가기 위한 한 사람으로 자리 잡기 위한 과정이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1년은 짧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반대로 6개월은 확실히 짧다. 한 학기를 마치고 돌아가야할 때, 아직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하고 떠나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독일에서 살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냐고? 그렇지 않다. 가치 있는 깨달음은 내가 어떤 부분이 독일에 잘 맞고, 어떤 부분이 한국에 잘 맞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싶었던 깨달음을 1년이라는 시간으로 알게 되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누군가는 결국 독일이 나에게 알맞지 않았으니 시간 낭비가 아니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어떤 유토피아가 나와 완벽하게 어울리겠는가. 유토피아인 나라는 세계 지도 어디에도 없다.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를 알고 한국에 돌아가면 언제든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겠다고 느꼈다. 예를 들자면 독일어다. 독일어를 못한 채로 살아갈 순 있어도 흡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한국과 정 반대선상에 있는 나라다. 독일이 인간적임을 추구할 때 한국은 편리함을 추구한다.
무엇이 더 옳다라기 보다는 배경이 많이 다르다. 한국인으로 평생 살며 체득하였던 간편함의 중요성. 그러나 편리한 게 모두에게 편안한 상태는 아니구나를 독일을 보며 알았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기다릴 때, 한국인은 빠른 계산을 위해 매대를 더 오픈하기를 원하지만 독일인은 캐셔와의 스몰톡을 기다린다. 계산대 몇 개가 열려 있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런 사소한 하나 하나가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관찰을 하고 보니 납득이 갔다.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적인 룰이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앞선 글에서 나는 인간관계로 꽤 힘겨운 시간을 보낸 이야기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을 찾아갔고 굳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품으며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 인간관계를 성취라고 생각한 것 같다. 외국에서 최고의 인싸가 되는 나를 상상했으니 말이다. 독일에 왔으니 독일인과 어울려야 한다는 강박과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대체 왜 나를 안 좋아하는 거지 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내가 한국인이라서 무시하는 건가 라는 오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자신에게 든 적이 있다면 나는 당신께 그건 오해다 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냥 성향이 잘 안 맞는 것이다.
애쓰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어, 문화, 배경 전부 같은 한국인끼리도 잘 맞는 사람, 안 맞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수많은 나라가 한데 얽혀 있는 공간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재밌는 것은 워낙 다양하게 섞여 있다보니 국적이라는 범주로 취향이 묶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콜롬비아, 멕시코 같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과 유독 잘 맞았다. 그들의 활기차고 외향적인 에너지가 나와 잘 어울렸고 하루 아침에 우리 가족이야! 할 수 있는 즉각적인 유대감이 좋았다. 또 하나는 폴란드다. 폴란드 사람들은 표현이 크지 않지만 묵묵하게 나를 참 좋아하는구나 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K 컬쳐가 폴란드에서 인기가 많고 LG나 삼성 같은 기업들이 폴란드에 많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종종 독일에서 만난 친구의 오빠가 한국 대학원 다니고 있다거나 삼성에서 근무해서 한국을 가본 적 있는 사람들도 많다.
역사적인 공감대도 있어서 나는 폴란드 사람과 말할 때 역사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했다. 웃픈 이야기지만 폴란드와 한국이 같은 순간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하면 서로를 흥미로워하게 된다. 광복절인 8월 15일은 폴란드군의 날(Święto Wojska Polskiego)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는 일본인도 있었어서 서로 깔깔 웃어댈 수 있었다. 당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와 토시, 마타를 보고 있던 디아고의 표정이 선명하다.
인도 사람들과도 참 잘 맞았다. 내가 느낀 인도 사람들은 의리있고 정직했다. 나에게 인도는 베일에 쌓인 국가였는데 이들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K 드라마, 영화를 섭렵한 친구들이 많았다. 첫 만남에 나에게 남자친구 있어? 라고 한국어로 말하거나 태권도를 배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줘서 황송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한국을 좋아해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걸 몰랐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진지하게 인도 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뭄바이에 사는 두르브와 절친이었는데 내가 신혼 여행을 가면 뭄바이- 고아-몰디브가 이어지는 순서는 어떨까 상상했다. 물론 미래 남편의 협조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저마다 어울리는 사람은 다르고 때때로는 국가나 대륙 기준으로 취향이 확실해지기도 한다.
일본인이었던 토시는 독일인과 편해 보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내 경험 상으로도 두 나라가 같은 바이브를 지니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았다. 내가 친하게 지냈던 독일인들은 하나같이 라틴아메리가 국가로 에라스무스를 (유럽 국가 교환학생 프로그램) 다녀왔거나 라틴 음악을 즐기는 경우였다. 또한 샘이라고 전형적인 독일인의 느낌보다는 활기차고, 장난을 좋아하며 남동생 같다고 느끼지는 친구가 있었다.
이렇듯 나는 인간관계로 우울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에는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들도 떠나고 독일을 벗어나지 못한 채 비자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 친구들의 가벼운 약속이 취소되는 순간들이 겹쳐져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지나니 우울함의 모든 순간까지 적응을 위한 과정이었고 그 시간에서 답을 찾아나가는 순간들이 필수적임을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문득 느끼는 게 외국인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독일과 비교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종 외국인들을 보면 먼나라 한국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져 골똘히 보게 되기도 한다.
모두에게 새로운 곳은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매우 값어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놓여진 모두가 그 값어치 있는 시간을 잘 보내길 바란다. 보상없는 고통의 시간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