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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Aug 20. 2024

리트리버의 여름 나기

더울 땐 수평 자세

8월도 중순을 넘어섰고 날은 처서를 향해 달리는데도 폭염은 꺾일 기세가 없다. 연일 외출을 자제하라는 경고 알람이 울리고 잠시만 외출을 해도 숨을 몰아 쉬게 되는 더위 속에서, 사시사철 빽빽한 이중모로 무장한 레트리버는 어떻게 생활할까?



도시에서 기르는 레트리버는 에어컨을 틀어주며 적정 온도를 유지해 주기에 털갈이도 늦다는데, 시골 생활을 병행하는 심바는 4월의 어느 때 이른 무더위 속에 예상보다 이른 털갈이를 시작했다. 심바의 털갈이는 꽤나 오랫동안 진행되는 편이어서 첫 두 달 간은 겉에 나 있는 부드러운 갈색털이 빠지고, 7월 말 여름의 절정이 지나면서부터는 빤잘빤질 윤이 나고 고양이 수염처럼 끝이 뾰족한 하얀 속털이 빠진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집은 비상태세다. 매일매일 두세 번씩 청소기를 돌리고 물청소를 하고 돌돌이를 활용해 보이는 족족 털뭉치를 없애는데도 돌아서면 집안 곳곳에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춤추는 털이 한가득이다. 털 빠짐의 대명사인 페르시안 고양이를 키울 때에는 그것이 털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시련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덩치가 20배는 더 큰 레트리버를 키워보니 페르시안의 털갈이는 애교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빗이 스치기만 해도 왕창왕창 빠지는 털뭉치


 고유의 갈색 털이 몽실몽실 휘날리며 구름처럼 둥실둥실 집안을 떠다니고 흰 털이 가시처럼 가족들의 옷과 살에 박히는 동안 심바도 더위로 몸살을 앓았다. 산책을 좋아했던 녀석이기에 비교적 선선한 저녁 시간대를 골라 잠깐만 산책을 다녀와도 헥헥거리며 겨우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누워 있기 일쑤다. 입맛도 떨어져 한 달에 10kg~20kg 가까이 먹던 사료를 입에도 대기 싫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온종일 기력 없이 늘어져 잠을 자는 모습에 여기저기 날리는 털을 보며 곤두섰던 마음도 측은지심으로 만드는 레트리버의 지친 얼굴.



골든 레트리버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진 품종이다. 스코틀랜드는 북극권과 접해 있지만 멕시코 해류의 영향을 받아 따뜻한 편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온난다습을 넘어서 아열대성 기후에 가깝게 변하고 있는 한국의 더위와 북극권에 가까운 스코틀랜드의 여름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다양하고 멋진 개를 길러 보고 싶은 사람들의 욕심과 그에 맞닿은 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다면 애초에 우리나라에는 발 들일 일 없었을 한국의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인 것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한국에 들어와 한국형 레트리버 '인절미'가 된 이상 골든 레트리버도 이 끈적한 더위에 적응해야만 하고 그들은 또 그 나름으로 이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1. 수평 자세*

고양잇과 동물에게는 그 어떤 동물도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추운 날씨에도 어떻게든 따뜻한 장소를 찾아내어 그에 가장 적합한 자세와 표정으로 겨울을 즐기는 능력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나 난로 옆, 보일러가 가장 따뜻하게 바닥을 데우는 아랫목에서 식빵을 구우며 노곤하게 잠든 고양이는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온도를 높혀주곤 한다. 고양이가 추위에 완벽하게 적응한 종이라면 레트리버는 더위에 가장 잘 적응한 종이다. 더위에 가장 좋은 대처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위와 무용! 움직임 없이 시원한 장소를 찾아 차가운 바닥에 누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는 것이다. 수평 자세로 여름을 맞이하여 에너지를 비축하는 데에 있어 레트리버보다 특화된 종이 있을까? 그들은 여름을 잘 보내는 방법을 포착해 빠르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 그를 위해 24시간 선풍기를 틀어둔 집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무방비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는 그를 보면 덥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감히 바닥에 누워 볼 여유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하는 자연에 적응하고 생존에 가장 적합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안위를 챙기고 순간을 즐기는 데에서 나는 우리 집 강아지에게 완벽하게 져 버렸다.   

* 수평 자세 : 팟캐스트 '여둘톡' 여름 한담에서 소개된 여름을 잘 보내는 방법 중 하나.



2. 물놀이

레트리버는 '물트리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물을 좋아하는 종이다. 타고난 능력으로 수영을 즐기는 그들의 발에는 물갈퀴가 있을 정도이니 그 정도면 물놀이에 가장 진화된 포유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더운 날에 그들에게 가장 좋은 피서 방법은 물놀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더운 계절이면 물이 좋은 계곡이나 깨끗한 바다는 사람들로 붐비기 마련이기에 대형견들은 감히 물놀이를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이만 키우던 시절의 나부터 물놀이하는 개를 보며 눈살을 찌푸린 경험이 있기에 그와 같은 물에서 수영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의 질타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토록 더운 계절, 눈 앞에 있는 시원한 계곡 물에 들어가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보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계절에는 산이나 바다로 떠나지 않는다. 대형견을 키우는 견주들 중에는 안타까움에 사람이 찾지 않는 깊은 산으로 떠나는 이들도 있다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우리 부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아쉽기만 하다. 작은 하천에서 사람 없는 시간 짧게 즐기는 물놀이로 만족하며 아쉽지만 물놀이와 작별을 고한다.


좁지만 꽤 괜찮은 전용 반신욕장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로 칭해지며 사랑받는 개도 눈치를 받으며 물놀이를 즐기지 못하는데 다른 동물들의 경우는 말해 뭘 할까. 모든 것이 사람 중심인 세상에서, 누구도 주인이랄 수 없는 계곡물에 가볍게 목을 축이지도 못하는 야생 동물들은 어떻게 이 뜨거운 여름을 버텨 나가고 있을까? 급격하게 변하는 기후를 이해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한 채로 더위에 지쳐갈 많은 짐승들을 생각한다. 에어컨을 틀어둔 시원한 집에서 그들의 걱정을 하고 있는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먹먹해져만 온다. 무해한 표정으로 잠든 심바의 옆에서 그가 있어 다른 동물들의 얼굴을 감히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3. 특식

더위에 지친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식욕이 없어 잘 먹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여름이면 특식을 준비해 본다. 늘 준비해 두는 동글동글 크고 예쁜 얼음 옆에 커다란 볼 한가득 우유를 얼리고 닭 안심을 삶아 호호 불어 식힌다. 감히 그 앞에서 복날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아이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조금만 기운을 차려 보라고 토닥여 본다.


큰 개가 지친 숨을 몰아쉬는 날이면
조용히 속삭여 본다.
이렇게 더운 나라로 데려와서 미안해.
이런 우리라도 널 사랑해.
그러니 앞으로 더 더워진다 해도
견디는 걸 포기하지 말아줘.
더 많이 먹고 더 힘차게 걷자.

힘내.
곧 가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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