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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Apr 19. 2024

골든 레트리버가 천사견이라고요?

3대 악마견, 그 위에 레트리버

우리나라 단어에는 접두사 ‘개-’를 붙여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끔 만들어진 단어들이 존재한다. 굳이 욕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개살구’, ‘개떡’ 등과 같이 다소 질이 떨어지거나 야생 상태에 있는 것들에게 ‘개-’를 붙여 부정적인 단어를 만든다. ‘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접두사가 생겨났나, 아무리 나쁜 개도 사람만 할까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소위 천사견이라 불리며 그 견품을 칭송받는 골든레트리버를 키워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접두사 ‘개-’의 의미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흔히들 3대 악마견이라고 부르는 견종이 있다. 비글, 코카스패니얼, 슈나우져가 그 주인공으로 고집이 세고 활동성이 좋으며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집안 가구나 생필품을 물어뜯는 등 다양한 사고를 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레트리버는 언제 어디서나 천사견의 반열에 든다. 그들은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는 한편 유순하고 순종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욕구를 먼저 내세우지는 않는 참을성 많은 견종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이에 어린아이들의 육아를 일부분 담당하기도 하려니와 탐지견, 안내견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tv도 같이 보는 내 친구


그런 특성을 가진 탓에 레트리버를 입양하는 사람들은 커다랗고 따뜻하고 유순한 개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것이라는 같은 결의 꿈을 꾼다. 사정은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아서 레트리버와 함께 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날들을 꿈꾸며 꼬물거리는 강아지를 입양했다. 그러나 모든 욕망에는 반동이 있는 법, 우리 가족은 우리가 품었던 기대와 다소 다른 일상을 마주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레트리버는 천사견이 분명하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태어나서 만 3년이 지나고 혈기 왕성한 청년기를 지나 장년기에 접어든 완숙한 경지에 이른 레트리버만이 천사견이라는 아름답고 고상한 칭호를 얻을 수 있다.


그 말인즉슨 레트리버라는 종은 생의 초반 3년간 일생 동안 칠 수 있는 모든 사고를 다 저지르고 반려인들에게 모진 고난과 인내의 시간을 선사한 이후에야 비로소 머리 위에 거룩한 엔젤링을 두른 천사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자연계에는 중력, 인력, 장력 등과 더불어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법칙 - 지랄 총량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만 세 살이 되기 전의 레트리버는
어떤 견종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악마견이다.

할많하않


1. 레트리버는 콘크리트를 뚫는다.

레트리버를 키우고 난 뒤 나에게는 독특한 취미생활이 생겼는데 부러 악마견들의 영상을 찾아 보며 히죽이곤 한다는 것이다. 영상 속 개들은 벽지를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파헤치며 집을 엉망으로 만들곤 하는데 한때 그 모습은 우리 가족의 이상이기도 했다. 다른 견종들이 벽지를 물고 뜯으며 사고를 치는 동안 레트리버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뚫기 때문이다. 배수관의 지름에 얼추 맞게 뚫어져 있던 에어컨 배수 구멍이 내 주먹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넓어져 있던 날을 기억한다. 이게 왜 이렇지? 원래 이 구멍이 이렇게 컸나 고민하는 순간 눈에 들어온 이빨자국들. 90년대 후반에 강화된 건축 기준에 따라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의 벽면을 뚫어내는 레트리버의 힘과 열정을 누가 무슨 수로 말릴 수 있을까?

그건 이만 놓으시개


2. 목조로 된 구조물은 레트리버의 이갈이용 개껌이다.  

말 그대로다. 집 안에 존재하는 목조로 된 각종 가구와 인테리어 프레임들은 레트리버의 이갈이용 개껌에 불과하다. 콘크리트도 뚫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난 이후 아끼던 원목 테이블이 점점 작아져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고도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런 나라도 목조로 된 발코니 창틀 프레임이 쪼개져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한 순간에는 마음속 깊은 탄식과 함께 익숙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디 창틀에 그칠 것인가. 빙문과 문지방, 걸레받이 등 목조로 된 모든 구조물들은 그의 이갈이용 개껌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의 이갈이가 끝나는 시기까지 집안 곳곳의 구조물이 사라지는 장면을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집에서 화분을 가꾸는 것은 거대한 판타지에 가까운 일이었다. 싱크대 상판에도 너끈히 닿는 그들의 앞발에 버텨 나갈 화초가 무엇이 있을까? 평화롭고 초록초록한 집은 레트리버에게 거대한 도시락일 수밖에 없음을 여러 화분을 떠나 보내고 나서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때 몬스테라였던 너, 안녕!


3. 물고기는 헤치지 않아요. 다만 물놀이가 좋을 뿐.

도심의 길은 아스팔트로 정비되어 레트리버가 물 웅덩이에 정면으로 노출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외의 시골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산책로 곳곳에서 마주하는 자연스러운 물 웅덩이들과 물이 가득 들어차 있는 논밭, 시골집 모퉁이에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이 쉴 새 없이 골든 레트리버를 유혹한다. ‘이리 와~ 이리 들어와서 나랑 놀자.’ 생명을 중시 여기는 레트리버답게 그곳에서 여유롭게 헤엄치는 금붕어에게는 관심이 없다. 첨벙첨벙 와장창! 살얼음이 깨어지고 냉수마찰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리면 틀림없다. 12월, 1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도 그를 유혹하는 내면의 소리를 따라 연못으로 들어가 반신욕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본능에 따라 물에 뛰어들어 때로는 얼음물속에 들어 앉아 득도하듯 반신욕을 즐기는 그를, 때로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물 웅덩이를 뛰노는 아이들처럼 물장난에 신이 난 그를 어떻게 타박할 수 있을까. 다만 길고 긴 물놀이가 끝나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아이를 끌고 들어와 씻기고 씻기고 또 씻기고, 청소하고 청소하고 또 청소하는 고행이 있을 뿐이다. 그 길고 풍성한 털을 말리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시골이 좋아!


4.  사정거리 확인하기!

찹쌀떡 같았던 아기 레트리버는 1년 6개월 동안 무럭무럭 성장했다. 앙증맞은 앞다리를 쭉 뻗어 올려도 30센티가 채 되지 않던 아기 시절을 보내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 앞다리를 뻗으면 식탁 위에, 싱크대 상판 위에도 올라설 수 있는 성견이 된다. 이제 그의 놀이터는 소파나 테이블 위가 아니다. 웬만한 높이의 서랍장 위, 싱크대 위에 있는 각종 소품과 아이들의 장난감, 소형 가전, 먹거리, 쓰레기들은 이제 그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고 깔끔하게 치워 놓고 바이바이 작별했던 집이 음식물 쓰레기와 아이들의 간식거리,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함께 뒹구는 전쟁터로 탈바꿈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매일 바뀌는 사정거리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스케일이 커져가는 저지레를 감당하며 굽어진 허리와 각종 관절염을 덤으로 얻었다.

앙증맞은 발이지만 식탁 위는 난장판


5. 전선 주의보

이갈이가 심해지고 그의 각종 악마 같은 행동에 이골이 난 가족들이 그의 입질에 살아남은 온갖 물건들을 추스르고 나면 이제 그는 한없이 심심해진다. 사정거리 안에 물건도 음식도 존재하지 않고 갉을 수 있는 모든 구조물들이 식상해지고 나면 그에게는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각종 가전제품의 전선들이 마지막 남은 선택지가 된다. 조심스레 접근하여 앞발로 살살 건드려보고 긁어도 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단이 들면 과감하게 돌진하여 선을 끊고 물어뜯는다. 소형 가전의 경우는 질질 끌려다니는 장난감 신세가 되기도 한다. 덕분에 tv와 에어컨, 로봇 청소기에 공기 청정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선과 핵심 부품을 교체해야 했고 혀를 끌끌 차는 AS기사님과는 사담을 늘어놓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린 날 십자인대 수술을 하게 된 우리 아이는 힘든 수술과 회복 기간을 거치며 조숙해져 채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천사견의 경지에 올랐다. 이제는 제법 세상사에 통달하여 웬만한 원목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이 들어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꿈처럼 여겨졌던 화초를 가꾸는 일들도 조금씩 시도해 본다.


그런데 그렇게도 바라고 바랐던
평화로운 일상이 비로소!이어지는 가운데
왠지 모를 섭섭함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천방지축 사고뭉치 악마견의 호기 넘치는 기계와 그치지 않는 호기심, 와글와글 쉴 새 없이 움직여 대던 어린 댕댕이가 그리워지는 걸 보면 사흘이 넘다 하고 울고 불고 짜증 내며 집안을 수습하던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닐들을 보내는 듯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끝니지 않는 저지레에 눈을 흘기고 화를 냈다가도 꾸밈 없는 귀여움에 한껏 들떴던 그 모든 시간들을 함께 지나왔기에 그들과 비로소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인자하고 자유로운 자연이라는 삶의 터전을 동물들에게서 빼앗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타협해 온 지난 시간 덕분에 성숙해진 것은 오히려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혹여 철없는 아기 강아지 덕분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 나와 자신의 본성을 덜어내고 사람들과의 일상을 자신의 터전으로 받아들인 그의 만남이 천사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예쁜 집은 다음 생에 만나요.
우리 집의 인테리어 소품은
해맑게 웃는 골든 레트리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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