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혈액량은 보통 4L에서 6L이다. 나의 경우는 약 4.08L일 것이다. 사람은 그중에서 20%가량 잃었을 때는 곧바로 수혈받으면 생명을 이어 나갈 수 있다. 30% 이상 잃었을 땐 과다 출혈로 사망할 위험에 처한다. 500mL 생수병 두 개 남짓이면 내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경계쯤에 있는 양이 될 것이다. 늘 마시는 생수병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겨우 이만큼에 사람의 생사는 갈린다.
생사의 경계에 대해서 약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를 거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의 친할머니는 아마도 1932년생이고, 파킨슨병을 오래 앓아왔고, 발병 후 자식들의 집을 이곳저곳 오가며 지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요양원에 있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최근에 갑자기 응급실로 실려 갔다.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이미 뇌의 혈관이 상당 부분 막혔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가망이 그다지 없을 거라고 했다.
가족들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모였다. 할머니는 산소 호흡기와 각종 호스를 잔뜩 연결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할머니가 어쩔 수 없이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보였다. 의사는 환자분이 이대로 며칠을 버틸 수도 있고 길어지면 몇 달까지 버틸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의사의 말을 믿었다. 할머니의 피붙이들, 그러니까 큰고모와 작은고모와 아버지와 삼촌과 막내 고모와 그들의 자식들은 계속 병원에 오가며 간호했다. 간호라기보다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임종을 놓치지 않기 위한 로테이션에 가까웠다.
쓰러진 날로부터 한 달이 더 넘은 지금까지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고 있다. 겨우 며칠 또는 몇 주 뒤엔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 없기는 하지만. 돌아가시지 않기만 한 게 아니라 오히려 거의 회복하고 있다. 처음에 할머니는 의식은 찾았지만 환시를 보는지 헛소리하고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젠 이름까지도 부르며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소식들은 모두 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었다. 나는 급하게 병원으로 모였던 첫날을 제외하고는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회복되어가는 걸 보면서 다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손주, 증손주까지 총출동해서 했던 그 난리와 걱정도, 다른 것들도.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상상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건 아버지가 크게 상심할 거라는 점과 돈, 이 두 가지였지, 사실 할머니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퇴근하면 할머니 병실에 다녀오는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자식 중에서 할머니를 특히 극진히 간호한 건 삼촌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 얘기를 전하면서 남동생에게 대견함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단지 좀 의외라는 생각만 들었다. 내 어릴 적 습관대로 아직도 작은아빠라고 불리는 삼촌은, 그러니까 인간 도리 자식 도리 같은 것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알코올 중독자였다. 2년 전에는 간이 급격하게 손상되어 쓰러져서는 죽음 직전까지 갔다 왔다. 그때 아버지와 나와 언니는 영정에 쓸 삼촌 사진과 검은 옷을 챙겨 내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울에서 삼촌이 있는 목포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내려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산소 호흡기 설치에 동의하느냐는 전화를 받았고, 꽤 큰 비용이 들 것이 당연했지만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설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의사는 그날 밤이 큰 고비가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던 삼촌은 가족들의 오랜 걱정과 간호를 거쳐 결국엔 살아났다. 살아나서는 다시 술을 먹었다.
알코올 중독, 복역 경력, 두 번의 이혼, 어느 직업에도 끈덕지게 정착하지 못하는 삶. “남 밑에서 일하는 건 아주 징해부러야.” 삼촌은 남 밑에서 일다운 일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 말을 자주 했다. 온갖 장사와 자질구레한 사업만 전전했고 카드빚은 당연히 있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꿔가서는 갚지 않았는데 우리 집에서 빌려 간 금액만 천오백쯤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쉬쉬하는 탓에 삼촌이 왜 징역살이했는지는 모른다.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삼촌이 걸핏하면 술에 취해 살림살이를 부수는 통에 삼촌 집에는 남아나는 게 없었다. 온몸이 벌겋도록 술을 먹고는 첫 번째 아내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살리네, 죽이네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 사람도 자기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극진하게 변하는가보다, 부모의 죽음은 그 정도로 힘이 센 일인가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작은아빠가 죽었다. 그저께 일이다.
할머니가 쓰러진 건 10월 14일이었고, 삼촌이 갑자기 떠난 건 그저께인 11월 16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언니의 말소리에 깼다. 새벽까지 소설을 고치다 잠든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잠결에도 장례식이나 발인 같은 단어들이 들렸다. 당연히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았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장례비를 모두 책임지려고 했고, 언니가 얼마간 보태길 바랐다. 나는 눈도 다 못 뜨고 거실로 나가면서 말했다.
어떻게 또 우리야? 자식이 그렇게 많은데, 나누지도 않고.
방금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 일을 우리만 떠안을 순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조의금이 많이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친가 사람들 일 앞에서는 유독 이기적으로 굴게 된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씁쓸한 것 같았지만 타협하지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돈 문제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그제야 언니가 말해줬다.
삼촌이야, 할머니가 아니라.
작은아빠가? 왜?
언니도 아직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자살 아니면 술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서 물어볼 때까지, 나는 자살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주변인의 자살을 겪으면 무너져 버릴 게 뻔했으니까. 누군가의 죽음을 겪을 때마다, 이전에 경험했던 죽음들은 얇은 흙 아래에 덮여있다가도 한꺼번에 되살아나곤 했다.
자다가 별안간 피를 엄청 토했어. 토하면서 소리쳤다더라고 응급차를 불러달라고. 이송되다가 죽었어.
간은 증상이 늦게 나타나기 때문에 사전에 큰 통증을 못 느꼈던 것 같다고 아버지는 덧붙였다. 삼촌은 요즘 할머니 병원에서 가까운 작은고모 집에 머물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니,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삼촌이 난데없이 우리 집에 찾아왔던 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쓰러지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삼촌이 오기 전날 밤, 나는 이제 따로 사는 엄마의 집에서 잠들었었다. 그리곤 한낮이 다 되어서야 본가로 돌아왔다. 저녁에 있을 대학원 수업에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내가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화장실 안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거칠어서 나는 아버지가 웬일로 어제 과음을 했거나 피곤해서 목이 잠겼나보다, 그래서 회사도 하루 쉬었나보다 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삼촌이 나왔다. 놀란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삼촌은 잠깐 왔다고, 아버지가 퇴근해서 올 때까지만 있다 갈 거라고 했다. 집에는 삼촌뿐이었다.
나는 빠르게 짐을 챙겼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쪽을 보지도 않고 삼촌이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소설 쓴다고 들었는데 잘 쓰고 있느냐, 대학교 다니느냐, 지금 학교 가느냐 그런 말들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다고만 했다. 대학을 대학원으로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내게 오는 물음보다 길이가 짧은 대답만 하고 집을 나왔다.
그 뒤로 26일 동안 삼촌은 살아있었다.
그때 딱히 병색을 느끼진 못했다. 전라도 말씨와 날카로운 눈매 모두 그대로였다. 목소리에 힘이 없지도 않았는데, 다만 얼굴빛은 아주 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