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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희 Aug 31. 2023

통과하는 빛과 통과하지 않는 빛 (6)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삼촌.
큰외삼촌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마지막 멜로디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궁금하실 것 같아서요. 엄마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이젠 나이가 있으셔서 병원을 자주 다니긴 해도 심각한 건 아니에요. 병원 근처에 엄마가 좋아하는 채소 가게가 있어요.
병원 다녀오는 길엔 꼭 그 가게에 들러요. 그때그때 탐스러워 보이는 과일을 사고, 제철 반찬을 만들어 먹고요. 집에 있는 시간엔 거의 내내 유튜브를 틀어 두시더라고요. 요리 영상도 보고, 동물들도 보고요.
큰외삼촌은 가만한 얼굴로 얘기를 들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 정도는 괜찮죠? 가족들 말이에요.
큰외삼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영상을 끄고 키패드를 열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 너머에서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대뜸 안성에 왔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엄마가 놀라면서도 웃었다.
혼자서 거길 다 갔어?
그냥, 갑자기 오고 싶어서.
왜 말도 없이 혼자 갔어. 엄마랑 같이 가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문이 잠겨 있어서 담도 넘었다고 했더니 엄마는 또 웃었다.
잠깐만….
카메라를 열어서 마당을 찍었다. 수돗가 옆에 있는 내 그림자를. 정확히는 나의 그림자와 보이진 않지만 큰외삼촌의 투명한 그림자가 함께 담겼다.
사진을 전송했다.
잘 보여?
잘 보여.
내 그림자랑, 바닥도?
보고 있지… 바닥도 많이 갈라졌네.
잘 저장해 두셔요.
아직 사진을 보는지 엄마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말했다.
그럼. 어떤 사진인데. 오늘 돌아와?
나는 아마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올 때 꼭 차 조심하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대로다, 목소리가… 웃음소리도.
큰외삼촌이 말했다.
나는 집 풍경을 몇 장 더 찍어서 엄마에게 보냈다. 그런 나를 큰외삼촌은 묵묵히 바라봤다. 어쩐지 말간 그 표정을 보자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저한테 오신 거죠?
큰외삼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난 큰외삼촌이 뒷마당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해는 이제 한풀 꺾였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큰외삼촌이 돌아 나오지 않아서 집 뒤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성한 풀들, 그리고 뒤로 이어진 산뿐이었다. 나는 큰외삼촌을 불렀다. 마당을 돌아보았다. 별채에 들어가고, 잠긴 문들도 흔들어 보고, 대문 밖으로 나가서 길과 밭을 다 보아도 큰외삼촌은 없었다.
큰외삼촌과 함께 도착했으나 사라진 집에 나는 혼자 서 있었다.
불현듯 큰외삼촌이 떠났는데도 상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고요한 기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게 큰외삼촌은 오늘 처음으로 만난, 짧은 순간을 같이한 사람일 뿐이니 당연한 걸까. 만났고 대화를 나눴는데도 나는 아직 큰외삼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이 집에서 북적거리며 살았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적막해진 집을 바라보았다. 왕성한 풀벌레 울음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을. 엄마와 형제들이 어릴 적부터 자란 집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 큰외삼촌과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집, 외할머니가 홀로 남아 지키던 집,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시자 온전히 혼자가 된 집. 그 수많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엄마의 친정으로서만 기억되던 곳. 엄마가 자라난, 진짜 엄마의 집.
내가 종종 느끼곤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상실감, 그게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부터. 나는 큰외삼촌도 외할아버지도 내 삶에서 가져 본 적 없기에 잃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을 가졌었고, 잃었다. 어쩌면 장례식에서 엄마 등에 꼭 붙어 있던 나에게 갓 시작되던 엄마의 애도가 전해진 것일지도.
햇빛이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수돗가로 돌아와 앉았다. 큰외삼촌이 앉았던 자리는 여전히 환했다. 손으로 짚자 따뜻했다. 햇볕의 온도였다. 그 온기를 느끼면서, 내가 지금 바라봐야 하는 건 큰외삼촌이 아니라 그런 큰외삼촌을 잃은 엄마라는 것을 이해했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슬픔을 곁에서 챙겨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나는 엄마의 애도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의 슬픔을 마주할 때면 그 마음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결코 거기에 다가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엄마는 내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장막 뒤에 있다고. 그 슬픔을 함부로 들춰선 안 된다고.
하지만 앞으로 나는 엄마가 잃어버린 순간들을 상상하고, 그로써 나조차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순간에 있게 될 것을 안다.

나는 상상한다.

어린 큰외삼촌이 엄마의 책가방을 대신 들고 뛰어 주던 그 마음과 모습을. 옆에서 같이 달리던 어린 엄마를. 까맣고 깡마른 아이들. 일어나던 흙바람, 잰 발소리, 돌멩이를 튀기며 달리는 발들, 같이 차오르던 숨, 엇갈리는 숨, 빠르게 뛰는 작은 두 심장, 버스에 가까스로 올라탄 아이의 웃음, 가까스로 올라탄 아이의 안도, 오빠가 들어 주었던 가방을 건네받는 아이, 팔에 느껴지는 가방의 묵직함, 안도, 안도.
그러나 돌아보면 오빠는 그 자리에 없다.

친척으로부터 어쩌다 얻게 된 하나뿐인 스케이트화. 집에서 장남인 사내아이의 발에도 약간 큰 스케이트화.
겨울, 벼를 베고 한가해진 논, 물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논, 먼 빙판에서부터 불어오는 시린 바람, 새빨간 스케이트화를 끈으로 매어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아이, 바스락거리는 짧은 점퍼, 어느새 형제 중에서 키가 가장 커진 아이, 논두렁에 앉아 스케이트 끈을 단단히 조이고, 얼음 위로 내딛는 첫 발걸음, 휘청이는, 주저하면서 나아가는, 서서히 힘이 붙는, 얼음을 베며 나아가는 소리, 바람 소리, 누군가 불었던 휘파람 소리.
아이가 가지고 돌아온 스케이트화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 또 다른 자그마한 아이. 오빠보다 키가 작고, 소매를 여러 번 접은 옷을 입은 아이. 오빠가 밖에 나간 사이 몰래 스케이트화를 들고 논으로 향하는 잰 발걸음. 주머니에 챙겨 왔던 양말을 두 개씩 밀어 넣고도 헐거운 스케이트화. 아무리 끈을 세게 조여도 안에서 흔들리는 아직 작은 발. 아이는 오빠의 스케이트 날이 빙판에 그렸던 끝없는 곡선을 본다.
발에 맞게 되었을 때는 누구도 신지 않는 스케이트화. 집 한구석에 버려져 삭아버린, 이제 더는 새빨갛지 않은, 하지만 끈으로 여전히 매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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