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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희 Aug 31. 2023

통과하는 빛과 통과하지 않는 빛 (4)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

햇빛이 흠뻑 쏟아졌다. 칠이 벗겨진 남색 대문 앞에 우리는 서 있었다.
집은 기억보다 훨씬 낡았다. 풀벌레 소리, 바람에 잎들이 나부끼는 소리, 멀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시골집 몇 채가 드문드문 있을 뿐이어선지 주변에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에게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낮은 담장 너머로 마당과 빈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대문 열쇠는 아마 큰이모와 작은외삼촌에게 있을 것이다. 주말에 이따금 찾아와서 집 앞 밭에 콩이며 고추며 작물을 기른다고 했다. 하지만 대뜸 연락해서 열쇠를 달라고 할 순 없을 거였다.
혹시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어요?
큰외삼촌은 머쓱한 미소만 다시 지었다.
어깨높이쯤 오는 시멘트 담장은 큼직한 균열도 가 있고, 손으로 잡고 흔들면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 엄마가 다섯 살, 큰외삼촌이 여덟 살 때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그럴 만했다. 결국 내가 담 위로 올라갔다. 담을 넘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무게가 실리자 낡은 담장은 더 흔들렸다. 큰외삼촌은 잡아 주지도 못하고 바라만 봤다. 막상 올라오자 생각보다 높았다. 그래도 나는 뛰어내렸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었다. 큰외삼촌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당까지는 들어왔지만 집의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주로 쓰는 본채는 창문까지 단단히 잠겼고, 별채는 허술한 창호지 미닫이마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생전의 외할머니는 자식들이 말려도 집의 모든 문을 일절 닫아걸지 않았었다. 시골에서 그러면 야박하단 소리 듣는다면서.
적어도 창문 하나쯤은 열려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더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조금 허탈하게 바라봤다. 잊고 있었는데 잠자리가 정말 많았다.
큰외삼촌은 마당 구석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집 뒤쪽으로 향했다. 뒷산으로 이어지는 뒷마당엔 풀들이 무섭도록 자라 있었다. 곧 집으로까지 넘어올 것 같았다. 관리가 잘 안 되는지 지붕엔 거미줄도 크게 드리웠다. 거미줄 바로 곁에까지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죽은 잠자리가 거미줄에 걸려 있는데도 별일 아니라는 듯 가깝게, 무심히 날았다.
우리는 돌아 나와 별채 앞으로 왔다. 자식들이 떠난 뒤로는 창고 방으로 쓰던 곳이었다.
나는 녹슨 자물쇠를 가리켰다.
부수면 안 되겠죠?
들어갈 수 있어.
큰외삼촌이 덤덤히 말했다. 벽에 자물쇠가 걸린 오른쪽 미닫이가 아니라 왼쪽 미닫이를 열면 된다고. 왼쪽 미닫이는 방 안쪽에서 고리로 걸려 있는데, 그걸 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게 있어요? 안에 있는 고리를 어떻게 열어요?
창호지를 살짝 뚫어야 하기는 해.
허무해서 조금 웃음이 나올 뻔했다. 워낙 고전적인 그러니까 너무 인간적인 방법이었다.
창호지를 찢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죄책감이 들긴 했다. 손을 넣으니 고리는 쉽게 풀렸다.
문을 열자 방이 밝아졌다. 큰외삼촌이 소리도 없이 먼저 방으로 들어섰다. 내가 따라 들어가자 먼지가 일었다. 나는 재채기를 했다. 큰외삼촌은 방을 천천히 바라봤다.
빛바랜 벽지며 책들이 부드러운 누런빛을 띠었다. 어릴 때 외갓집에 오면 이 방이 신기했다. 아주 오래된 물건이 많은 방.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쿰쿰하지만 나른해지는 냄새가 나던 곳. 그 공기 속에서 삼촌들의 이름이 적힌 영어회화책을 들춰 보다 낮잠이 들기도 했었다. 외할머니가 시집올 적에 만들어 왔다는 골무를 끼우고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보는 날도 있었다.
큰외삼촌이 들려줬다. 아주 낡은 이 지구본은 맏이인 큰이모가 처음 취업하고 동생들에게 사다 줬던 선물이라고. 지구본을 처음 갖게 된 어린 막내 이모는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를 집에 두 번이나 데려왔었다. 큰외삼촌은 지구본 돌아가는 소리가 좋아서 조용한 방에 엎드리고 누워 하염없이 지구본을 돌린 적도 있었다. 나는 큰외삼촌이 가리키는 자리의 잔짐을 조금 치웠다. 그러자 백과사전 시리즈가 나왔다. 큰외삼촌은 어릴 때 이 백과사전을 정말 아꼈다고 말했다. 동생들에게 꼭 읽으라고 권하면서도, 동생들이 페이지를 접거나 뭔가를 묻히면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뒤로 어린 엄마는 백과사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린 작은외삼촌은 형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조심 읽었다. 그 얘기를 하면서 한쪽에 놓인 탁상 거울을 보는 큰외삼촌의 얼굴은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구석에 놓여 있는 스케이트화도 보였다.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이지 낡았다. 스케이트 날은 워낙 녹이 슬어서 붉게 보였다.
저 스케이트화, 친척 형이 신던 걸 물려줬어. 우리 형제는 여섯인데 스케이트는 하나뿐이어서 저걸 신겠다고 엄청들 싸웠어.
이걸 탈 만한 데가 있어요?
겨울에 논이 단단하게 얼면, 거기에서 탔지.
듣고 나니 엄마한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엄마는 말했었다. 스케이트를 너무 타고 싶은데 스케이트화가 남자 사이즈고 많이 커서, 양말을 두 개씩 욱여넣어서 겨우 신고는 했다고.
이렇게 녹슨 날이 빙판 위에서 나아갔으리라곤 상상되지 않았다. 들어 보니 생각보다 묵직했다. 세월에 갈라진 가죽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어떤 느낌이야?
가죽이 꽤 얇고… 갈라진 자리는 거친데, 예상했던 것보단 부드러워요.
그리고?
정말 궁금한 눈빛으로 큰외삼촌은 집요하게 물어 왔다. 나는 녹이 슬어 우툴두툴한 스케이트 날의 촉감을, 날을 만진 손에 묻어나는 녹 냄새를 설명했다.
녹 냄새….
손에선 약간 거슬릴 정도로 비릿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스케이트화를 건넸지만 큰외삼촌은 당연히 받을 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지도 않았다.
약간 비릿한, 피 냄새 비슷한 냄새요.
그제야 큰외삼촌은 기억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묵직해요. 두꺼운 책, 저런 백과사전을 두어 권 정도 들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겉가죽은 갈라지긴 했어도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안쪽 가죽은 훨씬 거칠거칠하네요. 만졌던 손은 먼지 때문에 좀 텁텁한 느낌이 나요.
큰외삼촌은 만질 수 없으니 촉감도 느낄 수 없고, 후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큰외삼촌처럼 기억을 들려줄 순 없어도 감각은 들려줄 수 있었다. 묘사하는 동안, 혼자였다면 적당히 보고 지나쳤을 스케이트화가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큰외삼촌이 부탁하는 물건들을 대신 느꼈다.
나는 빛바랜 지구본을 가져와 바닥에 앉았다. 지구본은 매끄럽진 못해도 손길을 따라 여전히 잘 돌아갔다. 큰외삼촌은 눈을 감고, 어쩌면 그리웠을 그 소리를 들었다. 지구본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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