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하는 빛과 통과하지 않는 빛 (2)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2
큰외삼촌을 만난 것도 비슷한 일일까?
들을 수 없는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알 수 없는 순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돌아가신 큰외삼촌을 처음 알아보던 때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죽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30년도 훨씬 더 전에 죽은 큰외삼촌이 눈앞에 있을 순 없었다. 내 시신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도로는 깨끗했다.
방금 전 기억을 되짚어 봤다. 내가 알기로, 나는 집 앞 횡단보도를 막 건너온 참이었다. 그 직전에는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고, 6월 말 햇살을 피해 손차양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열한 시밖에 안 됐는데 볕이 뜨거웠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쪽만 꽂은 이어폰에선 느린 음악이 흘러나왔다. 곡이 바뀌었다. 느린 음악에서 더 느린 음악으로. 그리고 신호도 바뀌었다. 나는 손바닥만큼의 그늘에 의지하면서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건너편에서 줄곧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신호가 바뀌어도 유일하게 길을 건너지 않고 이쪽을 보던 사람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래서 방금 길을 건너온 것처럼, 나는 그 사람을 마주하고 섰다. 큰외삼촌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타너스 그늘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나는 아직 손차양을 거두지 못했다. 차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물다섯 살 그대로인 큰외삼촌을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전신 거울에 언제나 사진이 붙어 있는 사람이었다. 짙은 눈썹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 선명해 보이던 얼굴. 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무슨 말이라도 먼저 건네 올 줄 알았는데 큰외삼촌 역시 말없이 나를 오래 볼 뿐이었다.
나는 오래 의아했고,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뜬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과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에만 꽂았던 이어폰을 뺐다. 그리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큰외삼촌도 따라 걸었다. 네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느릴 것도 빠를 것도 없는 걸음으로.
돌아보자 햇빛으로 환한 골목을 큰외삼촌이 걷고 있었다. 그림자는 없이.
갑자기 찾아온 손님답게 큰외삼촌은 조금 어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거실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하고 서둘러 마실 것을 내왔다. 하지만 큰외삼촌은 주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조심스럽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보기 바빴다. 입고 있는 청 재킷이 꽤 더울 법한데도 그랬다. 아직 6월이지만 밖은 완연한 한여름이었다.
큰외삼촌이 스물다섯 살이던 그해 5월에 그 사고가 났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그로부터 5년 뒤 같은 달이었다. 위아래로 입은 저 청 재킷과 청바지는 사고가 나던 날 입었던 옷일까. 80년대에 한창 유행했다는 스타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핏자국은 없었다.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큰외삼촌은 지금쯤 60대 초반이 되었을 거다. 그 나이까지 자연스럽게 나이 들 수도 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쌓이고, 표정을 지을 때면 눈가와 입가에 당연하게 자잘한 굴곡들이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다. 30대인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선풍기를 틀자 미지근하고 나른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지날 때도 큰외삼촌의 머리카락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꾸 시야를 가리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넘겼다. 몸이 있어서 나는 덥고 목마른데, 큰외삼촌은 내내 평온한 것 같았다. 여전히 커다랗게 뜬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볼 뿐이었다.
유리잔 안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죄송해요. 편하게 보세요.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 보통 사람이었다면 나는 진작 집을 둘러보시라고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도 궁금하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 했다.
큰외삼촌은 가장 가까운 내 방문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발소리가 전혀 없었다. 이제 보니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도. 신발은 혹시 벗을 수 없는 걸까?
큰외삼촌은 아직 문 앞에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정말 괜찮아요. 들어가 보셔도 돼요.
방문이 이미 한 뼘쯤 열려 있는데도 문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찮으세요?
내가 다가가자 큰외삼촌이 조금 멋쩍은 듯이 웃었다.
어느 사진에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미소였다. 군대에서 후임들과 나란히 앉아서 찍은 사진이었나.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한낮의 햇볕으로 후덥지근한 방 안에서 큰외삼촌은 별거 아닌 것들, 창가의 화분이나 쌓여 있는 책, 안경 같은 것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았다. 뭐랄까 정말 궁금한 표정이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 제목도 일일이 다 읽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렇게 유심히 보면서도 책을 꺼내 보거나 들춰 보진 않았다. 어떤 것도 함부로 만지지 않는 큰외삼촌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지도 몰랐다. 산 사람의 물건이니까.
문을 열 수 없다, 어쩌면 물건을 만질 수 없다, 의자에 앉을 수 있다,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다, 실내로 들어올 수 있다, 어쩌면 물을 마실 수 없다, 바람이 그대로 지나쳐 간다, 빛이 통과한다.
지금까지 큰외삼촌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