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벽이다.
가파르고 무심한 벽.
그곳에 생 하나가 매달려 있다.
산비탈을 깎아 밭을 일구었을 것이다. 경사가 심한 바위산 자락이니 아래 밭과 위 밭의 단차가 날 수밖에 없고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곳은 삼십 여 미터에 이른다. 더구나 새로 바뀐 주인이 흙을 넣는 성토작업을 하면서 위 밭은 더욱 높아졌고 비탈은 급경사가 되었다.
구불구불한 땅의 경계를 잇는 긴 비탈면에서 그곳은 가장 넓고 경사가 심한 곳이었다. 돌과 자갈이 많아 풀도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뿌리가 강한 산딸기와 찔레, 가시덩굴만 무성했다. 비가 올 때마다 산에서 쏟아지는 물이 위 밭을 거쳐 아래 밭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여기저기 깊숙한 골도 생겼다. 잡을 것도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매년 덤불을 쳐 줄 때마다 나무 막대를 지팡이처럼 짚고 낫질을 하고 톱질을 해야 했다. 잠깐 발을 헛디디면 아래 골창까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런데도 산짐승들은 그곳에 길을 냈고 물을 먹으러 개울로 내려왔다. 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일까.
해가 기울기를 기다려야 했다. 알고 있었다. 연이은 폭염에 길도 들도 산도 끓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 도심의 분수대마다 아이들이 뛰어들어 뿜어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혀를 길게 빼고 학학대는 개들을 위해 마당에 뿌려 놓은 물이 지우개로 지워지듯 재빠르게 말라 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낫을 챙겨 들었다. 통증은 때로 무감각의 정도로 그 깊이를 보여준다. 휴대폰에 뜨는 익숙한 전화번호에도 깜짝깜짝 놀라던 시간들,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던 때는 파들파들 살아 있던 의식이 몽롱해지는 때가 많아졌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았다.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공간을 떠다녔다. 사물의 경계는 자꾸 희미해졌다. 기둥에 이마를 박거나 문 모서리에 어깨가 찍혔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의 끝이 눈동자 바로 앞에서 비껴갔고 순간 스친 풀잎에 살이 벌어져 검붉은 피가 배어났다. 익숙한 길이 흔들리고 내려앉았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걸어가면 나무나 전신주를 관통할 것 같았다. 어떠한 색깔도 없던 물체에 어느 날은 온갖 색깔이 들어와 있었다. 몸이 비어 갔다. 삭아 갔고 바래 갔다. 바싹바싹 말라 바스러질 것 같았다. 방충망에 붙어 굳어 버린 잠자리 혹은 길바닥에 떨어진 매미의 날개처럼. 수십 만 킬로미터 떨어진 달이 지구의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 낸다 했던가. 시간에 밀려 똑같은 때 똑같은 곳을 오가며 저녁이 오기를, 검은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새로운 것도 의미 있는 것도 없었다. 덜걱거리며 먹고 자고 움직였다. 삶을 지탱하는 건 단단하고 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늘고 가볍고 얇은 것이라는 것을, 한 오라기 실 같은 이유가 해저에 잠긴 무거운 삶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계절이 반복될수록 깊어가는 무기력 속에서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