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세월이 흐른다고 한 사회의 제도가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 처음 들여다보게 된 법전 속 상속법에는 이름 모를 이들의 눈물과 한숨, 숨은 노력이 배어 있었다. 상속 지분조차 1978년까지는 장남과 차남 이하가 각각 1.5와 1.0의 지분이었던데 비해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은 딸은 0.5, 결혼한 딸은 0.25의 지분이었다. 가족 안에서 온전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의 권리는 그들이 짊어진 의무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이후에 배우자의 지분이 높아지고 아들과 딸의 지분이 같아졌지만 장남은 호주 지분이 가산되어 배우자와 같은 1.5의 지분, 차남 이하와 결혼하지 않은 딸은 1.0, 결혼한 딸은 0.25의 지분이었다. 결혼한 딸은 지속적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성별이나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녀들이 동일한 지분을 상속받을 수 있었던 것은 1991년 이후였다. 견고한 법률 조항을 비집고 물길을 냈던 이들. 판례와 옛 자료 속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내 싸웠고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견딘 상처, 묵묵한 시간들. 그네들이 힘겹게 밀어 올린 토대 위에 나는 서 있었다.
서면을 주고받으면서 푸른 이끼가 낀 채 살아있는 가부장제의 잔재(殘滓)를 보았다. 문장 뒤에 감춰진 조롱과 모욕, 뼈아픈 여성에 대한 무시와 차별과 마주해야 했다. 어린 여자애들이 무슨 농사일을 했냐고 했다. 열두 살, 열세 살 시골학교 아이들이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 모내기 지원을 나가던 시절이었다. 달력을 잘라 끈으로 묶은 뒷면엔 호미로 고추밭, 가지밭을 맸다는 삐뚤삐뚤한 글씨들이 가득했다. 나는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꺼내 수십 년 전 글자들을 보고 또 보았다.
고향 집 옆과 산 속에 있는 서너 필지의 작은 농지들. 땅의 위치에 따라 ‘윗밭’이라거나 ‘건너밭’ 등으로 불리던 논과 밭. 땅의 번지인 지번(地番), 그 감정 없는 숫자로만 호명되는 그 땅들이 4대(四代)를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터전이었다고, 뜨거운 땡볕 아래 엎드려 손끝 발끝 갈라지며 그곳을 일구고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고, 논바닥에 발 한 번 디딘 적 없고 손에 흙 한번 묻혀 본 적 없는 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고, 무례함과 불손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재판은 진실이나 정의가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는 사실만을 다룬다.
소중했던 과거가 부정당하는 건 아팠다. 엄마는 창피하다며 꼬박꼬박 놀러 가던 마을회관을 가지 않았다. 보행기를 밀며 바깥마당을 돌고 또 돌았다. 두 손에 염주를 들고 문기둥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속죄의 불경을 외웠다. 누구도 엄마의 기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수백 쪽에 달하는 서류 속 어디에도 엄마의 목소리는 없었다. 엄마는 밀려났고 접혀 있었다. 그러나 병환 중인 할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된 엄마의 오십 년은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제쳐놓거나 무시될 것이 아니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 호미를 쥐었던 우리의 어린 날은 그리 가볍게 짓밟힐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서면을 썼다.
흰 머릿수건 매고 엄마가 김을 매던 밭, 들깻잎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엄마의 기일이 온다. 사건에 대해 가타부타 내색 없던 엄마가 삶의 거의 마지막 즈음, 탄식하듯 했던 말. “미리 말을 할 것이지···.” 그게 다였다. 어떤 원망도 없었다. 사람을 미워하지 못한 분, 도리를 지키며 사신 분, 제 이름으로 가진 것 없던 가난한 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커다란 전쟁을 두 번이나 겪고 가난의 시대를 넘어 이 땅에 살다 간 많은 ‘여인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엄마가 아무것도 남긴 게 없이 떠났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딛고 간 걸음걸음, 시간을 넘어온 그 선함과 곧음이 내게 위대한 유산(遺産)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