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밭은 화덕처럼 달구어져 있었다. 햇빛이 닿는 곳은 탈 듯이 뜨거웠고 더 이상 열기를 받아낼 수 없는 풀과 나무와 하늘과 땅이 달아오른 몸을 열고 있었다. 아래 논둑에서 무성히 올라온 환삼덩굴이 콩 포기들을 휘감고 있었다. 탁, 탁. 풀은 잘리면서 쇠의 날카로움을 가져갈 것이니 낫의 날은 금방 무뎌질 것이다. 한낮 온도가 삼십 도를 넘어가면 보통의 풀들은 자라지 못하는데 환삼덩굴, 가시박, 칡 같은 넝쿨식물은 오히려 기세를 높였다. 함성을 지르며 성벽을 오르는 군사들처럼 곳곳으로 줄기를 뻗어 관목과 다른 풀들을 칭칭 감고 허공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탁, 탁. 가뭄에 질겨진 줄기는 쉽게 끊어지지 않고.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아래 논 들쑥과 버드나무, 뽕나무 이파리 우거진 사이로 슬그머니 일어섰다. 고라니였다. 마을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짐승. 논도 가깝고 개울도 가까워 산에서 내려와 논과 밭을 뛰어다니다가 휴경 중인 작은 논 풀 우거진 그늘에 숨어 쉬곤 했다. 놀랐던 건 지금까지 보았던 고라니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대한 몸 때문이었다. 황소처럼 크고 단단했다. 낫질 소리로 곤한 휴식을 깨웠나 미안해 멋쩍어하는데 짐승이 피하지도 않고 조용히 나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작은 인기척에도 튀듯이 숲으로 돌아가는 경계심 많은 짐승, 무슨 일인가 허리를 펴다, 보았다.
눈, 크고 맑고 깊은 눈. 삶의 빛나는 시간과 이지러진 시간을 모두 지나온, 늙고 오래된 선조(先祖)의 눈. 알고 있다고, 네가 지나온 시간을 알고 있다고, 손을 뻗으면 감싸 잡고 쓸어 줄 것만 같은 따뜻한 눈. 산의 정령 같은, 고개 숙여 예를 갖춰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위엄이 짐승에게 있었다. 새벽 산책길에 만난 적 있는가. 작년에 묻어준, 한겨울 폭설에 마을로 내려와 무릎 꿇고 죽은 새끼 고라니를 아는가. 뭔가 말을 건네도 될 것 같은 마음까지 닿아 가는데, 짐승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순간, 불룩한 가슴 아래 앞다리 하나가 덜렁댔다.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 덜렁, 덜렁.
오랜 법적 다툼이 끝났다. 긴 시간이었다. 내 이름을 문서 안으로 밀어 넣은 이들은 이미 지상에 없었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번쩍 들려 내쳐진 진흙탕 속에서 날아오는 칼날에 베이고 또 베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들이 파헤쳐지고 속살이 드러났다. 가까운 이들과의 감정 소비가 컸다. 몸도 마음도 남루해져 나는 황량한 들에 맨발로 서 있었다. 산을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힘들다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태로웠다. 잡을 것이 없었다. 힘겨웠던 일이 정리되었다는 기쁨도 만족도 없었다. 사람이 버거웠기에 사람 세상에서 버틸 이유가 없었다. 세상은 벽이 되었다. 단단하고 딱딱한 벽, 그 벽을 오를 의지도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 고라니가 올라가고 있었다. 팔월 한낮 뙤약볕 속, 창날 같은 햇살 등짝에 맞으며 온 몸 땀에 젖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삼채밭 건너뛰어 그예나 들어선 비탈. 주르르 미끄러지고 주르르 미끄러지고. 갈라지고 메마른 곳에선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가는 다리, 이제는 균형도 맞지 않아 큰 몸 기우뚱 넘어가 금방이라도 허공에 내동댕이쳐질 듯한데, 굴러떨어지는 돌들의 소리가 우렁우렁 발밑에서 울렸다. 멈출 수도 뒤돌아갈 수도 없는 길. 마지막 숨 내려놓을 날이 내일, 일주일 혹은 한 달 뒤일지. 그래도,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산의 종족 세 개의 다리 힘주어 온 생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살라고, 너도 살라고, 살아 있으니 산 것으로 발버둥 치라고. 마침내, 번들거리는 붉은 등 장막 같은 푸른 하늘로 들어갔다.
새 울음소리도, 수크령과 억새 무더기 흔들림도 멈춘 거대한 침묵. 나는 밭머리에 서서 낫을 움켜잡고 있었다. 비명도 신음도 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면서.
바닥이 일어나 벽이 되는 순간 누구에게나 있다고, 지금도 누군가는 그 벽을 묵묵히 오르고 있다고, 비탈 아래에 설 때마다 세 개의 다리 늙은 고라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