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관을 짠다.
그동안 생명을 유지 시켰던, 소고기를 넣은 양배추는 물론 좋아하는 캔에 들어 있는 간식마저 거부한 지 닷새째, 물만 먹으면서 시간을 주고 있으니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톱과 줄자, 전동드라이버와 나사를 평상 위에 올려놓고 장마가 시작된 첫날, 부슬부슬 비가 오는 늦은 오후, 관을 짠다.
넓적한 판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창고 주위를 몇 번이나 돌아 살펴도 마음에 꼭 맞는 건 없다. 언젠가는 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떠나보낼 때가 되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허둥대는 건 사람과의 이별이나 동물과의 이별이나 매한가지다. 이전과는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 가는 기색에 때가 왔나 보다 하면서도 선뜻 준비를 하지 않은 건 마음 한구석에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장마 초기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비가 온다는 예보에 준비를 해야 했다.
무덤 자리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집 옆 산기슭, 밤나무와 참나무, 소나무가 어우러진, 볕 좋은 양달이었다. 칠 년 전 앞서간 새끼의 무덤 옆에 그 아비의 무덤을 팠다. 너울거리는 나뭇잎들이 비를 막아 주어 흙은 아직 젖지 않은 채 곱고 고슬고슬했다. 옛 어른들이 산소 자리로 가장 좋다고 할 묏자리였다.
작년 가을에 떨어져 겨울과 봄을 보냈으면서도 여전히 가시를 곤두세우고 있는 밤송이들을 걷어 내고 이리저리 가로질러 뻗은 나무뿌리를 삽날로 찍어 끊어냈다. 답답한 것을 싫어하는, 겨울에도 집에 안 들어가고 대문간 방석 위에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자던 녀석이니 넓고 깊게 파야 한다. 빗물이 들이치지는 않으나 습도 높은 날에 비옷까지 입고 삽질을 하고 있으니 얼굴과 등에 땀이 빗줄기다. 삽날 위에서 빗겨나가는 장화발로 한참을 파니 꽤나 넓고 깊은 사각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비에 젖은 몸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부드러운 흙에 떠나보내고 싶었다. 젖지 않게 구덩이 위에 비닐을 덮고 긴 나무와 돌로 눌러 놓았다.
무덤을 파 놓고 내려다보는 마을은 고적했다. 우산을 들고 농토를 돌아보는 이도 없었다. 몇 채 되지 않는 지붕들은 빗물에 반들거리고 나풀거리는 어린 모포기 줄 맞춰 늘어선 논으로 작은 물방울들이 자잘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길 건너 앞산 골짜기엔 뽀얀 물안개가 떠 있고 물의 무게에 눌린 나무들이 구부정하게 어깨를 굽히고 서 있었다. 빗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비탈길 딛고 내려오는데 발밑이 자꾸 꺼졌다. 마음을 추스르지 않으면 몸이 알고 주저앉을 것이었다.
서두르자. 무덤 자리 하나 파는 것만으로도 예상했던 시간은 훌쩍 넘어갔다. 여러 해 동안 많은 무덤을 만들었지만 관을 짜 준 적은 없었다. 갑작스레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길에서 만나는 들짐승들은 몸을 가려주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녀석은 가장 먼저 집에 들인 세 마리 강아지 중 하나였다. 눈이 크고 다리가 튼실해 보는 이들마다 “고놈, 참 잘생겼다!”고 했다. 한겨울 눈이 오면 그 위에 등을 비비며 좋아했다. 성격이 모나지 않고 낙천적이라 낯선 이들에게서도 사랑을 받았다.
좁고 긴 판자를 연결해 크기를 가늠하는데 손끝에 만져지던 야윈 등뼈가 떠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줄자로 길이를 재 톱질을 했다. 자꾸만 어긋나는 톱날을 바로 세워 잘라낸 판자 세 개를 바닥에 늘어놓고 기둥을 세우니 모양이 잡혔다. 거실 창가에 누워 톱질 소리와 전동드라이버 소리를 듣고 있을 녀석.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를 들고 앉아 있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 시간이 짧고 완연히 기운을 잃고 있다. 초점 흐린 눈에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체념이 읽혔다.
탈장으로 배변을 보지 못해 항문을 손으로 눌러 짜 주며 버텨온지 삼 년. 똥을 누지 못하고 활대처럼 등을 구부리고 서서 고라니처럼 “꽤액- 꽤액-” 비명을 질러대는 녀석을 안고 찾아갔던 세 군데의 동물병원. 두 명의 수의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세 번째 수의사만 위생장갑을 낀 손을 항문에 넣어 더듬어 보더니 탈장이라 했다. 삼장사상충에 걸려 있어서 그 치료부터 먼저 해야 하는데 이미 나이가 많아 치료 중에 사망할 수 있다 했다. 그렇게 심장사상충 치료를 해도 탈장 수술을 견뎌낼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실내에서 생활하는 아이가 아니고 넓은 공간을 누비던 아이라 좁은 케이지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연해졌다. 배변을 보지 못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이상 증세가 없었다. 잘 뛰고 잘 짖고 잘 먹었다.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좋아서 겅중겅중 앞서 나갔고 튼튼한 다리로 소변도 잘 보았다. 의사는 방법이 없으니 가는 날까지 좋아하는 거나 잘 먹이라 했다. 그러나 ‘가는 날까지’가 문제였다. 언제 갈지 어떻게 알 것이며 그때까지 배설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큰 눈 두리번거리며 크고 작은 동족의 다른 강아지들을 신기한 듯 돌아다보고 있는 녀석을 병원 대기실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