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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유 Sep 07. 2024

엄마의 유산(遺産)(1)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삼월에 내리는 눈이었다.

희끗희끗 흩날리다 말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치솟다 구부러지고 다시 내뻗어 갑작스레 방향을 트는,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에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해저의 물고기 떼처럼 몰려다니는 눈 무리에 툭, 툭 길이 끊기고 산이 갈라지고 집들이 동강 났다. 밀가루가 뿌려진 듯 길바닥은 금세 하얘졌고 싸락눈이 무더기져 바람에 밀려왔다 밀려갔다. 갈래 많은 차창 밖 눈발보다 더 사나운 눈발이 작고 오래된 빨간 차 안에 있었다. 뿌옇게 하늘을 뒤덮은 산발의 눈보라보다 더 거칠고 드센 눈보라가 운전석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바싹 앞으로 몸을 기울인 내 안 갈피갈피 몰아치고 있었다. 

고향 집으로 가고 있었다. 논과 밭을 메꾸고 산을 깎아 만든 길은 좁고 가팔랐다. 그 길 끝 가장 안쪽에 고향 집이 있었다. 검은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집. 한 번도 제대로 펼쳐 놓은 적 없는 시간을 차곡차곡 포개 놓고 엄마가 거기 있었다. 그 엄마의 머리 위로 쏟아질 천둥 벼락 같은 서류 하나가 뒷좌석 소파 위에서 덜컹거리고 있었다. 내던져지듯 놓여 제대로 여며지지 않은 가방, 열린 틈새로 삐져나온 갈색의 서류 봉투 모서리는 깊숙이 박을 곳을 노리고 선 예리한 칼날이었다.


만난 지 오래였다. 자라면서도 얼굴 마주 보며 이야기한 적이 몇 번이었을까. 아버지 사후 삼십 년, 관계는 더 뜸해져 집안 친척들의 경조사에서나 보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생전에 나름 우애를 돈독히 한다고 함께 어울릴 자리도 마련해 주었지만 다른 성별에 이십 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 집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시골과 도시라는 완연히 다른 거주 환경은 위화감만 깊게 할 뿐이었다. “너희 집 형제 몇이니?” 하는 질문이나 가족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서류에서 확인되지 않았다면 더 가물거렸을 존재였다. 그런 그가 소장을 보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토지대장만 있고 등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집안의 토지들을 자신의 생모 앞으로 등기를 한 사람은 그였다. 수확량이 많고 입지 조건이 좋아 자산가치가 가장 높던 아버지 명의의 논을 다른 형제들 지분을 모두 포기시키고 본인 단독 명의로 바꾼 이도 그였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호주(戶主)*였다. 그것만으로도 법에 따른 자신의 상속 지분을 훨씬 넘어서는 재산을 차지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생모 앞으로 바꿔 놓았던 토지들에 대한 이복동생들의 지분까지 박탈하려 하고 있었다. 

가사소송으로 끝날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가족관계등록부를 정리하려는 단순한 이유였다면 미리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가장 터부시되는 게 송사였다. 소송하면 삼대(三代)에 걸쳐 원수가 된다는 말도 있었다. 더구나 속사정이 어찌 되었든 형제간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에 상관없이 집안 전체가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었다. 더구나 팔순이 넘은 노모에게는 자신의 딸들이 ‘호적에서 파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터, 받을 충격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호주제도가 폐지되었다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게 의식이다. 입안이 썼다. 엄마가 느낄 배신감과 쓰라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는 이미 폭풍 속 출렁이는 배 위에서 검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산과 들과 나무와 하늘을 조각내며 내리던 눈발, 끊어지고 이어지던 가늘고 위태로운 눈길은 이후 푹푹 빠지는 십 년의 시간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치매와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의 수발을 들다 집을 나갔고 그 자리를 메운 이가 엄마였다. 시골 산골에서 병자를 돌보느라, 힘겨운 농사일을 하느라 엄마도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당시에 집을 나간 여인이 손가락질 받지 않았을 리 없고 부모형제 하나 없이 스스로 생계를 이어 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 여인의 삶도 분명 외롭고 서러운 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엄마와의 사이에 딸 셋을 두었다. 엄마는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아버지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지 않았고 엄마는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지 않았다. 서류에 드러나지 않는 가족의 숨은 내력은 어느 집안에나 있겠지만 상속문제와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진다. 법의 그릇은 현실을 담기엔 턱없이 작고 얕기 때문이다.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지만 ‘일부종사(一夫從事)’ 하지 못한 것을 ‘죄’라 여긴 엄마. 게다가 당시엔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흠이었으니 엄마는 평생 쇳덩이 같은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집안에 불운이 있을 때마다 엄마는 염주를 굴리며 “내 죄다-.”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싫어 나는“그게 왜 엄마 탓이야?”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의 죄의식은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는 김씨 집안에 헌신했고 아버지에게 복종했고 이복 자식들에게 극진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에게 서류 정리를 요구하지 못했고 첫 번째 남편의 이혼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호적에서나마 엄마는 한 남편을 섬긴 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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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민법에서 호주(戶主)는 한 가족의 대표를 뜻했다. 호주제도 하에서 호주 승계 순위는 장남, 차남, 그외 아들, 미혼의 딸, 아내, 어머니, 며느리 순이었다. 상속 시 호주 지분까지 가산해 받는 등 가족 내 우선 서열을 부여받았고 그러한 호주와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 본적지, 성명, 생년월일 등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문서가 ‘호적’이었다. 남녀차별이란 비판으로 2008년 폐지되어 부모, 자녀, 배우자의 인적 사항만 기록하는 가족관계등록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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