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통역 건에 답변하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요?”
뒤돌아보니 주성이다.
“어, 여긴 웬일이에요. 아, 학교 다닌댔지? 박사과정.”
“큰일 치른 것 치고 얼굴은 괜찮네.”
주성에게 커피를 사기 위해, 지하 카페로 내려갔다.
“응, 괜찮아야죠. 이제 눈치 안 보려고요. 그런 인간 위해 구질구질하게 일하지 않을 거예요. 다른 일 찾아야죠. 소문도 사실이 아니니 상관없어요. 고마웠어요. 주성 씨 한마디면 껌뻑 죽던데?”
“하하, 나야 베를린에서 유명하지. 양쪽 나라말을 할 줄 아니, 쓸모가 많더라고요. 한인 식당이 독일업체 끼고 하는 일은 내가 거의 관리하고 있어요.”
주성이 내민 명함엔 ‘백림 상사 대표’라고 적혀있었다.
“그것만은 아니고, 뭐 여러 가지 해요….”
주성이 뭔가를 얘기하려다 말을 흐렸다.
“와.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그 일에 박사 타이틀도 필요해요? 독일어를 왜 이렇게 잘해요?”
“하하. 또 그 질문. 한국어를 왜 잘하는지는 궁금하지 않고요?”
‘한국어를? 교포면 부모한테 배운 거 아냐?’
난 속으로 주성이 교포라 단정 짓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성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한참 창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동혁은 왜 뒤쫓아요?”
집 근처에서 서성이던 모습이 떠올라 물었다.
“룸메이트 정체 뭔지 몰라요?”
주성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되물었다.
“왜 이렇게 숨기는 게 많은지. 다들.”
“북한 고위급 관리예요. 컴퓨터 공학자라 북한 정보 빼내서 독일 정부에 넘기는 일 하고 있어요.”
난 기가 막혀 한숨을 내 쉬었다.
“주성 씨야말로 정체를 모르네요.”
“그런가?”
주성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도 구설수 많이 겪었어요.”
“왜요?”
“독일 입양아예요. 나. 친부모도 누군지 모르고요. 어딜 가든 뒷말이 많더라고요.”
“그건 몰랐어요. 미안해요.”
“하하, 그렇게 불쌍하게 보지 않아도 돼요. 다들 어른이 되면 독립해서 살잖아요. 한국인들 정이라고 해야 하나. 과도한 연민? 부담스럽더라고요.”
주성은 쓸쓸히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생한 사람들 더 독해져요. 자리 잡으면 다른 사람들을 품어야 하는데. 김사장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워낙 풍파가 많아, 여유가 없어요.”
“한동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것 같아요.”
“언젠간 이런 일도 추억으로 떠올릴 때가 있겠죠.”
주성은 입양아지만 좋은 독일 양부모님을 만났다고 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아마 양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닐까.
헤어지면서 그가 나를 꼭 안아준다.
“독일식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동성애자예요.”
그가 내 귀에 조용히 속삭인다. 그의 마지막 말에 머리가 잠시 띵했지만, 망설임 없이 그를 꽉 껴안았다. 잘 알던 교포 친구도 주성처럼 동성애자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네덜란드로 떠났었다.
"로운씨,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동혁을 진짜 생각한다면 내 말 그대로 전해요.”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나는 초침 소리만 심장을 때리는 듯 재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