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하자, 거실에 동혁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일찍 왔네?”
반가움을 숨긴 채, 그에게 다가갔다.
“졸업 얼마 안 남았지?”
그가 말했다.
“응, 한국에서 만날 수 있어?”
난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하하. 쉽게 말한다.”
“어려울 건 또 뭐야?”
“한국 가면 연락해도 돼?”
잠깐 뜸 들이다 동혁이 물었다.
“이제훈이라면 되지.”
그가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주성 씨 만났어. 동혁이 아니라 제훈이라고.”
“한국 가면 내가 쌓아 놓은 쓰레기 정리해야 해.”
“가만두면 널 덮칠 거야. 그거, 빨리 처리해.”
“한국 가면 드라마도 실컷 볼 수 있겠네.”
“네가 직접 찍을 수도 있지. 로맨스 드라마.”
제훈의 표정을 보니, 나도 가볍게 말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한국행이야. 이 공간이 쓸쓸하게 변하기 전, 떠날 수 있어 다행이야.”
난 집 앞 놀이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 있으면 베를린이 가을에 물들 거다. 한동안 빛이 귀해지겠지. 햇살이 적어지면 우울해지는 날도 찾아오겠지.
한국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있고, 친구들도 곁에 있을 거다. 항생제가 아닌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감기를 참지 않아도 된다. 흉내만 낸, 순두부찌개와 짬뽕을 먹을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왜 이리 서운한 걸까?
마지막 종강 파티에 갔다.
“졸업 축하해!”
필립이 말했다. 필립은 터줏대감처럼 학과 사무실을 지키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사회학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야. 어디든 어울리는 자리가 있을 거야.”
‘네가 낙관적으로 말하는 건 안 어울리는데.’
필립은 몇 년째, 학과를 떠나지 못하고, 행정 조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학이나 의학처럼 졸업하면 법조인이나 의사가 되진 못해. 기업에서 일할 수는 있지. 마케팅이나 고객 서비스 같은 곳 말이야. 기업에 영혼을 팔아서 말이야.”
필립의 말대로 사회학과 졸업생의 진로는 불투명했지만, 기업의 마케팅 부서에 취업하기도 했다. 사회학 이론을 통해 기른 비판적 시각과 다양한 사회 계층을 분석하는 능력을, 결국 기업의 이윤 창출이라는 현실적 목표에 써야 했다.
필립은 영혼을 팔 준비가 아직 안 될 걸까?
알렉산더와 리자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많은 독일인 커플들처럼, 따로 또 같이.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은 리자. 상관없다. 알렉산더는 졸업에 필요한 최소 학점을 주었다.
처음으로 벤이 춤추는 모습을 봤다.
요새 하늘을 나는 꿈을 많이 꾼다. 내 몸이 둥실 뜨면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법을 배운 거 같다. 장애인 마라토너 시원이 말한 것처럼, 나도 날 게 된 걸까?
벤이 몸을 천천히 흔들며 춤추는 모습을 보니, 무대에 설 용기가 생긴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자정이 훌쩍 넘자 독일 친구들이 하나, 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가 끝나면 혼자라는 게 더욱 실감 난다. 하루 종일 혼자였던 날보다.
기숙사가 보이는 골목길에 접어들자 누군가 쫓아오는 기분이 들어, 뒤를 보았다. 가로등이 골목길을 비추고 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누군가 뒤에서 불쑥 손을 내밀어 문을 연다.
“왔어?”
제훈이 나를 따라 집까지 오고 있었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오늘 늦는다고 했잖아. 심심해서 나가봤지.”
나를 쫓아온 검은 그림자는 제훈이었다.
“짐은 다 쌌어?”
“그럼.”
“기분이 어때?”
졸린 눈을 비비며 제훈을 쳐다봤다. 새벽 3시에 나눌 만큼 급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의 눈동자가 슬퍼 보여,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뭐, 막막하지. 7년 만인데. 한국이 얼마나 변했을지. 시원섭섭한 기분이야.”
“사실 나도 처음엔 무서웠어.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환경공학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너를 보면서 옛날 생각 많이 났어.”
“너 처음 봤을 때 북한에서 온 줄 알았 잖아. 하하”
“내가 의도했던 대로네.”
“비자에 문제 생길까 봐 걱정했다고. 국정원 같은 데서 조사 나올까 봐.”
“하하. 귀국해서 몸조심해야겠네. 네가 원했던 한국행이잖아. 잘될 거야….”
“고마워. 너와 동맹을 맺은 덕분이지 뭐. 학교에서 그리고 룸메이트로.”
제훈은 그제야 옅은 미소를 띠며 방으로 들어갔다.
“잘 자.”
그의 등 뒤에 작게 말했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번쩍 들어 브이 자를 그렸다.
‘우리의 동맹은 계속되는 거야.’
그의 뒷모습이 말하는 듯했다.
졸업장을 들고 과 사무실을 나가는데 벤이 보인다.
“우리 졸업 파티해야지?”
조금 쓸쓸해 보이는 데, 내 착각인 걸까?
벤과 만난 카페 ‘TALA’에서 난 다시 라테 마키아토를 시켰다.
“엄마는 내게 말했어. 똑똑한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계획만큼 우스운 게 없어. 계획대로 되는 건 없으니까.”
한국으로 떠나는 내게 벤이 내민 덕담치고 고약하다.
“넌 똑똑하니까 계획 세우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
다 생각대로 되진 않을 테니까. 뒷말은 내가 상상했다.
벤의 얼굴을 다시 천천히 바라본다.
“너와 오래 함께 있고 싶었어.”
벤은 들고 있던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했다. 표현하지 않아도, 그의 서운한 감정이 느껴졌다.
내가 선물한 스테인리스 젓가락은 아직 갖고 있을까?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 다음 달 한국에 돌아가고, 그는 졸업 후 베트남으로 떠날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벤을 집에 초대해 그가 좋아했던 잡채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다음 주 주말에 놀러 와.”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갤 끄덕였다. 눈에 뭔가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마트에 가서, 월남쌈과 잡채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벤이 처음 잡채를 먹을 때 짖던 표정이 떠올라, 괜히 설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약속 시간보다 일찍 기숙사 앞에 기다리던 벤이 장바구니를 낚아채며 말했다.
“벌써 왔어?”
난 당황하며 웃었다. 식사 준비는 아직인데.
“도와줄게.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어. 잡채. 어머니도 궁금해하시더라고!”
“정말?”
벤은 앞치마를 두르더니 익숙하게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열심히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나를 가르치던 벤이, 이제 학생이 되었다.
“맛있어? 혼자 할 수 있겠어?”
능숙하게 젓가락질하며 잡채를 먹는 벤을 보니 귀여웠다.
“어렵긴 한데, 해볼게.”
“걱정하지 마. 인터넷 찾으면 레시피가 만개는 될걸?!”
“네가 해주는 거랑 맛이 다를 거 아냐!”
난 그에게 잡채를 포장해 비닐봉지에 싸 주었다.
“어머님께 드려!”
“고마워!”
“베트남엔 언제 갈 거야?”
“곧.”
“혹시 나한테 연락할 수 있어?”
“그럼, 페이스북도 있고, 메일도 알잖아. 당연하지!”
벤은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우리가 언제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을지, 난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 한국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뭔갈 꺼냈다.
친구들은 졸업 선물로 자신의 스냅사진이나, 베를린이 새겨진 목걸이를 건넸다.
벤은 자신이 아끼는 책 한 권과, 마지막 인사를 담은 카드를 주었다.
그건 나에게 다시없는 졸업 선물이 되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선물이었다.